의기 논개를 만나다ㅣ진주촉석루, 국립진주박물관
Автор: 윤여환의 미술
Загружено: 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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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5일에 의기 논개 영정을 친견하기 위해 진주 촉석루 의기사를 찾았습니다.
진주 남강의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 촉석루는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南將臺),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壯元樓)으로 쓰였습니다.
촉석루 밑에는 천년의 역사를 안고 도도히 흐르고 있는 남강물에 반쯤 잠긴 의암바위가 있습니다.
1593년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마저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합니다.
그러자 그의 후처인 논개가 원수를 갚겠노라 결심하고 진주관기로 들어가, 촉석루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바위 위로 유인해, 깍지가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모두 가락지를 낀 채 함께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 떨기 꽃으로 산화(散花)했습니다.
그 후 그 바위 옆에는 그녀의 의열을 누대에 기리고자 정문부의 아들인 진주의 학자 정대륭이 쓴 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篆刻)해 놓았습니다.
그 옆의 암벽에는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논개의 단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촉석루의 뒷쪽에 위치한 진주 의기사(晋州 義妓祠)는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 입니다.
논개영정의 표정과 자세는 거사당일인 7월 7석날, 의기에 찬 모습으로 열 가락지를 끼고 투신순국을 위해 왜장을 향해 가려고 하는 자세로 설정했습니다.
논개영정의 얼굴은 논개의 생장지인 장수지역을 중심으로 신안 주씨 문중을 촬영, 얼굴을 계측 분석하여 신안 주씨가 가지고 있는 동일형태의 용모 유전인자를 추출해 내어 논개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얼굴 모형을 찾았습니다.
논개영정의 얼굴화장법은 넓고 네모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인 진수아미(螓首蛾眉) 미용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화장법은 족집게를 이용한 ‘뽑는 미용법’인데 고대 여인들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미용법입니다.
논개영정의 복식과 머리모양 고증은 출토된 당시 의상과 출토 목각인형 그리고 당시에 제작된 그림 등을 참고로 ‘출토복식연구소’에 제작의뢰 해, 논개의상 제작과 가체머리를 재현하는 등 철저한 고증과정을 거치는 과학적인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복식은 거사일이 하절기인 점을 고려하여 여름복식으로 하였고, 비단 바탕에 가로 110 cm, 세로 180cm의 크기로 작업을 했습니다.
의기사에 모셔져 있는 영정은 이모본이며, 정본은 국립진주박물관 2층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960년 의기사가 중건된 이후 김은호가 그린 논개 영정이 봉안되어 왔지만, 복식과 머리모양 등이 당대와 맞지 않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진주시와 장수군은 새표준영정 제작을 위해 전국 현상공모를 하고, 과학적인 고증작업을 통해, 2008년 2월 4일 현재의 영정이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8년 2월 15일 논개 국가표준영정을 이모본(移模本)과 함께 진주시 [국립진주박물관]에 인도하였고, 그 해 5월 23일 논개제 때 의기사에서 봉안식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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