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 셰익스피어 4대비극,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 Shakespeare, Hamlet, Othello / 셰익스피어 시리즈 ①
Автор: 북트래블 Book travel
Загружено: 20 февр. 2021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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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햄릿 #로미오와줄리엣
안녕하세요? 오늘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한마디로 문학의 최고봉입니다. 그를 인도와도 맞바꾸지 않겠다는 어느 영국인의 호언장담이 빈 말이 아닐 정도로 말이지요. 그는 인도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자신의 그림자로 가릴 만큼 우뚝 솟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이 얼마나 다채롭고도 장엄할까요? 그러나 그가 거대한 사람이니만큼 그에게 다가서려는 독자들은 그만큼 주춤거려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평생 독서 계획』의 저자이자 유명한 문학비평가였던 클리프턴 패디먼은 그런 '셰익스피어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요약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
참으로 멋진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젊어서 한 때는 암벽 등반을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만났던 등산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직접 네팔에서 사다 주신 '에베레스트 실물 사진'이 아직도 제 책상 머리맡에 걸려 있습니다. 한때나마 저는 꽤나 자주 그 사진을 올려다 보며 '언제쯤 저길 오를 수 있을까' 하고 꿈꾸었지만 이젠 좀처럼 그 사진을 올려다 보지 않습니다. 그런 도전을 하기엔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탓이지요. 다만, 그런 사연들이 쌓인 덕분에 마침내 2013년에 히말라야로 떠날 수 있었고, 그때 비로소 '희박한 공기'를 온 몸으로 체감하며 눈덮힌 고봉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지요.
제가 경험했던 체르코리(해발 4,950m) 등정만 하더라도 되돌아보면 몹시 힘겨웠습니다. 평소 풍부한 등산 경험과 막강한 체력을 갖춘 등반 애호가들 12명이 함께 도전에 나섰으나 상당수는 4,500m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더랬습니다. 저를 포함해 겨우 셋만 정상을 넘봤는데 4,500m 이상에서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덮인 너덜지대를 통과할 땐 털썩 주저앉고 싶은 때가 정말 여러 번이었습니다. 불과 두세 걸음만 옮겨도 극심한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가쁜 숨을 연신 몰아쉬어야 했습니다. 거기엔 산소가 평지의 1/3에 불과했으니까요. 그토록 희박한 공기 속에서 중력과 사투를 벌이는 일이 얼마만큼 고역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체험이었습니다.
다시 셰익스피어로 돌아오지요.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싶은 욕망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단번에 그 높은 봉우리를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듯이,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접근하는 것도 사정은 비슷해 보입니다. 그와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와 함께 절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참패'를 맛볼 가능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셰익스피어가 거인이라고 하더라도 에베레스트에 비유한 건 과장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 악물고 도전한다면 누구라도 셰익스피어를 읽어낼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어느 문학비평가의 말에는 고도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고소 적응 훈련'도 생략한 채 너무 무리해서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다가는 자칫 '고산병 증세'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일찍 하산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이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보여주는 멋진 절경들'을 즐겁게 보며 만끽하고 싶은 것이지 온갖 고통을 겪더라도 단지 오르는 데만 최종 목표를 둔 게 결코 아닐 테니까요.
이쯤에서 패디먼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지요. 그의 말엔 좀 더 효율적인 등반 안내 지침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는 인간이었지 반신半神이 아니었다. 그는 콜리지가 말한 것처럼 "일천 가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슈 아놀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무오류의 인간도 아니었다. 인류가 낳은 많은 천재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극단에 소속된 장인이었고, 바쁜 배우였으며, 영리하여 점점 번영을 구가한 사업가였다. 천재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고, 셰익스피어가 그 좋은 사례이다.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읽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사람이 평균적으로 70세를 산다고 보고 그 중에서 반년 정도의 시간을 투입하여 전집을 읽는다면 충분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37편 중에서 다음 12편을 필독서로 권한다. 한꺼번에 다 읽을 생각을 하지 말고 평생에 걸쳐 한 권씩 한 권씩 읽는 방법이 더 좋다.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헨리 4세』1부와 2부, 『햄릿』,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 『되에는 되로』, 『리어왕』,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오셀로』, 『태풍』.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이쯤 되면 패디먼의 이야기는 '에베레스트 정복'보다 한결 수월해 보이고, 한껏 고무적인 이야기로 변합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제가 바로 저런 이야기를 가슴에 꼭꼭 담아 두고서 '세익스피어는 최대한 천천히 만나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더랬습니다. 제가 앞에서 인용한『평생 독서 계획』속 문장들을 글로 옮겨 놓은 게 어언 11년 전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으니 말이지요.
셰익스피어를 억지로 외면한다고 해서 그가 영영 우리들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네팔이나 히말라야까지 가지 않더라도 평소에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에베레스트'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가 꾸준히 책을 읽다 보면 아무런 예고조차 없이 불쑥 나타나는 셰익스피어를 가끔씩은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사실 이 영상의 시작 부분에 인용한『햄릿』의 대사 또한 제가 2004년에 읽은 어떤 책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문장인데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이번에 다시금 인용하게 된 것이니까요.
제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무지한 탓에 정말로 곤혹스러웠던 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는 책을 읽을 때였습니다. 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몇 번씩이나 후회를 하곤 했습니다. 어쩌자고 내가 셰익스피어를 건너뛰고 이 책부터 붙잡고 나서 이 고생이란 말인가, 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몇 번씩이나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대로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영국 런던으로 당장 건너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하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속 공간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아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기엔 작품 속 인물들이 나누는 '셰익스피어 이야기'에 대해 제가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태껏 셰익스피어도 모르면서 잘도 지내 왔군.' 하고 제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 또다른 인물은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강의해온 헤럴드 블룸 교수였습니다. 그가 쓴 『교양인의 책읽기』는 여러 명의 소설가와 시인과 극작가를 다루고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특별히 [시인편]과 [극작가편]에 거듭 얼굴을 내민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다룬 부분에서는 『햄릿』을 매우 깊이있게 다루고 있어서, 그 작품을 미처 읽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 편도 제대로 읽지 못한 학생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특강'을 다루는 예일대 강의실에 불쑥 끼어든 꼴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당혹감이야말로 더 이상 셰익스피어와 햄릿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더없이 강력한 자극제였습니다.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사람들은 예로부터 아주 많았습니다. 그만큼 높이 솟은 문학의 봉우리를 우리는 앞으로도 영영 다시는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겨우 셰익스피어의 작품 대여섯 편을 읽은 독자 주제에 제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먼 발치에서라도 에베레스트를 한번 힐끗 올려다본 사람은 그 아득한 봉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늘상 떠들기 마련입니다.
이미 이십여 년쯤 전에 히말라야를 훌쩍 다녀온 친구 녀석으로부터 제가 들었던 가장 강력한 말은 이랬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히말라야에 가 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음하하하." 수많은 작가들을 높은 산들에 비유한다면, 셰익스피어에게도 누군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엔 셰익스피어를 읽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셰익스피어를 읽는 행위를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데 비유한 클리프턴 패디먼의 설명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 산악인만이 도전할 수 있는 에베레스트처럼 그렇게 난공불락의 봉우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패디먼도 그걸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고전"이라고 생각하며 접근하는 것보다, 새로운 드라마의 첫 공연에 참석하는 것 같은 기대감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처럼 '희박한 공기' 때문에 숨을 헐떡거리거나 메스꺼움을 느낄 리도 없습니다. 든든한 장비를 두루 갖추고 아주 유능한 셀파와 함께 목숨을 걸고 도전할 일은 더더욱 아닐 테고요.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했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가끔씩 전혀 예상밖의 엉뚱한 대답을 하곤 합니다. 거기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이지요. 제가 보기엔 셰익스피어도 아마 그와 비슷한 작가인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다 오르기는 몹시 힘들어도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걸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거대한 산 같은 작가이니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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