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Lennon - Imagine 전쟁 반대의 노래 / 존 레논 이메진 (원음파일)
Автор: 이 작 가 의 집
Загружено: 4 окт. 2019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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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권력과 명성을 티끌처럼 알았던 '존 레논'(John Lennon)이 그리운 날에 우리가 살고 있다. 지금 국내 정세는 그 티끌만도 못한 권력과 명성 때문에 시끄럽다. 종교적 믿음의 소리는 너무 높고 탐욕의 그림자는 너무 길다, 세상의 진실은 위선과 거짓으로 가리워졌고 하층민의 상처는 아물 기색이 없어 보인다. 안보는 불안하고 경제는 바닥을 치닷고 있다. 지킬 나라와 지킬 믿음과 지킬 재산이 없다면 우린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며 노래했던 존 레논, 그는 부와 명성을 한몸에 받았지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의 평화를 꿈꾸었다.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밑에 지옥도 없고 오직 위엔 하늘만 있겠지요.1971년 발표된 존레논 의 노래 이매진 Imagine 은 이렇듯 시적이자 철학적으로 시작된다. 천국으로 가고자 하는 세상의 수많은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기는 커녕 다투게 했고 우리의 눈을 가린 채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게 했다. 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를 죽이고 죽는 일도 없을 거예요' '종교도 소유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존 레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평화운동가 이었다.
존 레넌은 1966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미처 예상치 못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은 비틀스 음반 공개화형식을 치르고 살해 협박까지 일삼은 바 있다. 레넌은 71년 발매한 두 번째 명반( Imagine 이매진)에서도 "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국가도 종교도 없이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노래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한 세대가 흐른 뒤에야 진정한 그의 평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2010년 4월 14일 로마 교황청이 영국 팝 그룹 비틀스와 그들의 음악을 두둔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이 그룹이 저지른 '과거의 과오'에 대한 사면 의사를 재천명했다.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비틀스 해체 40주년을 맞아 주말판 1면에 게재한 기사를 통해 "그들(비틀스 맴버)의 마약 복용과 무절제한 생활, 심지어 자신들이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했던 주장 등은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며, 반면에 그들의 음악은 아직도 살아있다" 고 AP 등 주요 외신들이 전했다.
이 신문은 또 "그들은 당시 젊은이들의 최선의 본보기는 아닐 수 있으나 최악도 아니었다"며 그들의 아름다운 멜로디는 아직도 창의력으로 경이감을 안겨주고 있고, 음악애호가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고 치하했다. 이 교황청기관지는 2008년 11월 22일, 비틀스의 명반 '화이트 앨범' 발매 40주년 기념사설에서도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의 노래는 시간을 거슬러 살아 남아 한 세대 이상 팝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고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1969년 BBC라디오 와의 인터뷰에서 레논이 교회의 위선이나 권위적인 형식들을 싫어할 뿐, 자신도 예수의 열렬한 팬 가운데 한 명이라고 밝힌 내용이 그의 사후 28년만에 공개되기도 했다. 우리의 기억에 이미 클래식으로 남은 '이매진'은 영화 '킬링필드'의 파이널 배경음악으로 잔잔하게 흘러 나왔을만큼, 인류평화를 위한 시위와 집회현장에서 불리워졌던 영원한 팝음악의 고전으로 남았다.'킬링필드'는 1975년 부터 4년여 동안 캄보디아 공산당 무장조직인 '크매르 루주'가 자국민 약 200만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비틀스 해채 50주년. 레논의 사망 주기가 곧 40여년을 맞고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전쟁중이며 세계3차전쟁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전쟁은 바로 목전에 다달았다. 그 배경에는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가 그 불씨가 될것이며 그 마지막전쟁은 결국 종교전쟁이 될것이다고 예언하고 있다.
세상의 완전한 평화를 꿈꿨던 존 레논은 싱어송라이터이자 반전운동가, 예술가이자 평화운동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비틀스의 리더 존 레논, 그의 짧지만 방대했던 삶을 대표하는 곡이 '이매진'이다. 이 아름다운 멜로디 속에서 평화를 노래하는 '이매진'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곡이 아니다. 존 레논의 '이매진'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대를 거슬러 비틀즈를 역추적해야 한다.
비틀즈가 만들어지기까지 처음, 1957년 영국에서는 17살의 존 레논과 15살의 폴 메카트니의 만남이 있었으며,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결성을 하여 활동하였다. 존 레논의 부인으로 일본 여자인 오노요코가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지만, 이미 존의 첫 부인으로 19살의 신시아 파웰은 18살의 존 레논을 영국 리버플 미술대학에서 만났다. 폴 메카트니 역시 같은 대학에서 다시 만났으며 영원한 록 음악의 신화를 만들어 낸 비틀스는 미술학도로 출발한다.
신시아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 파란 눈의 금발 미녀였다. 신시아는 항상 줄담배를 피우고 늘 술에 취해있는 레논에게 거부감을 느겼지만, 그러나, 기타를 치고 치면서 노래하면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항상 깔끔하고 정숙한 신시아는 존의 깡패 같은 모습과 갑작스러운 분노에 기겁을 했지만, 존과 가까워지면서 아주 연약하고 예민한 상처받은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존 레논은 신시아가 필요했고 신시아는 존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다. 둘은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된 것이다.
존 레논의 '이매진'은 평화의집회 현장에서 자주 불리워졌던 노래지만 늘 뒤늦게 그 뜻을 알아차리게 되는 안타까운 노래이다. 현대사의 인류도 이 평화의 노래를 줄곧 불렀지만 그 진정한 뜻은 폭력과 전쟁, 기아와 참상, 대립과 억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 뜻을 음미하곤 하였다. 혼돈의 시대 1960년 대는 미.소. 양강의 구도는 탄탄해 졌지만, 실은 얼음장과 같은 것이다. 미국이 배트남 전쟁을 시작함으로 수 많은 사상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전쟁에서 가장 힘없이 놓인 자들이 바로 여자와 어린아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다.
공식적인 비틀스의 활동은 1962년 부터이다. 그리고 1964년 세계사에는 두 개의 침공이 벌어졌다. 그 하나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깊숙히 개입함으로 전 세계는 물론 미국 사회 내부에 깊은 상처와 불안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치료제를 원했다. 문화예술에 의한 치료가 필요했다. 그 치료제는 영국으로부터 건너왔다. 바로 비틀스라는 치료제, 미국의 저널들은 이를 '브리티시 록의 침공'이라고 표현했다. 1964년 비틀스는 첫 미국 콘서트 투어에 오른다.
그해 8월. 뉴욕에서 존 레논은 그 유명한 포크록의 대명사인 '밥 딜런'을 만나게 된다. 딜런 역시 전쟁반대, 평화의 음류시인으로 '천국의 문을 두드려라' Knockin On Heaen's Door 를 세상에 남긴 영원한 포크록의 신화이다. 이 노래는 존 레논의 '이매진'보다 더 평화의집회 현장에서 불리워 졌던 곡이다. 레논은 딜런에게 마리화나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한번도 피워본 적이 없다.'던 비틀스. 호텔문을 꼭 잠그고 바닥 틈은 타월로 막은 후 딜런은 능숙하게 마리화나를 말아서 피우는 법을 가르쳐 줬다. 이들은 이 첫 경험에 감탄했으며 비틀스의 음악 궤도는 바뀌게 된다.
비틀스와 밥 딜런의 음악은 마리화나의 영향으로 만들어 졌다. 그리고 이들의 약물은 LSD,해로인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LSD의 복용은 비틀스의 사고와 음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비틀스 음악의 분기점이 되었고 뱀이 허물을 벗듯이 비틀스의 음악은 환상적인 추상화로 변하기 시작했다. 록의 대가들은 그렇게 마약 과잉 복용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리고 '조지 해리슨'은 2001년 11월 29일 목과 허파의 암으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흰두교를 신봉했던 그의 유골은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1965년 이후 비틀스의 황금 시대가 열린다. 그로부터 1970년대가 개막하기 전까지 서구 대중음악에있어 가히 비틀스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1965년 비틀스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영국을 빛나게 한 명사에게만 주는 국가 최고의 훈장을 받게된다. 그러나 1969년에 존 레논은 영국의 월남전 참전과 나이지리아에 대한 불공평한 정책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받았던 훈장을 여왕에게 돌려주었다.
비틀스의 황금시대가 개막되면서 존 레논에게도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1966년에 오노 요코'를 만나게 된다. 런던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오노'의 전위예술'아방가르드'전을 보러 간 존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 일본 여류작가의 작품에 반하여 자기보다 키가 휠씬 작고 6년 연상인 요코에게 깊이 빠진다. 오노 요코가 존의 인생에 등장한 후, 존의 음악 인생뿐만 아니라 생활의 지침과 철학, 그리고 비틀스 멤버의 미래도 큰 영향을 받았다. 레논은 일본계 미국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에게 빠지면서 그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다른 비틀스 멤버들은 자기들 사이에 까다로운 여자가 끼어들어 참견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지만. 1971년 비틀스가 공식적으로 해체 됐을 때, 레논과 오노는 이미 결혼하였고 뉴욕에 정착해 있었다.
이 해에 존 레논의 인터뷰가 큰 스캔들이 되어 기독교 신자들, 특히 미국 신자들이 비틀스의 음반을 불태우며 방송 출연과 콘서트 등 모든 활동을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존 레논의 말은 집단 종교에 대한 답변이 되었다. '기독교는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나도 없어 질 것이다' '우리는현재 '예수'보다도 인기가 많다' 이 문장 때문에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일어난 것이다. 많은 레코드점에서 비틀스의 음반주문을 거부하였으며, 미국의 약35개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비틀스의 음악을 틀지 않겠다고 했다. 심지어 존 레논 암살설까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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