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쇼펜하우어/칸트/스피노자/코나투스/직관/인과율/충분근거율/시간과 공간/직관적표상/의지의 객관화/물자체/마야의 베일/순수주관/이념/자기부정/라깡/아공/법공
Автор: 인문학사랑
Загружено: 23 авг. 2024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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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함, 철학을 하는 이유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세계는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이고 경이로운 감정으로부터 시작됩니. 우리 인간에게 세계란 무엇인가 혹은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철학함이란 바로 무엇인가라는 그 근본적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세계에 관한 물음에 가장 관심을 보인 근대철학자는 스피노자와 칸트와 쇼펜하우어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태양과 대지, 사람과 동식물, 광물 등의 삼라만상의 존재근원은 무엇인가? 다시말하면 이러한 형이하학적인 대상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은 무엇인가를 묻는것으로부터 형이상학이 탄생되었습니다. 결국 형이상학은 어떤 원인과 결과를 이성적으로 밝히는 인과율에 종속된 인식론이 아니라 인과율에서 자유로운 존재론의 근거입니다. 그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주제도 존재론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세계를 눈에보이는 현상과 도저히 인식할수 없는 사물자체로 나누었고, 스피노자는 세계를 형성하고 움직이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자기존재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코나투스라고 말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표상과 의지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제기하면서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관없는 객관은 없다는 것, 혹은 객관은 항상 주관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표상은 삼라만상이 주관에 의해 한계지워지고, 결정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은 세계를 인식하는데는 인식하는 주관이 객관에 대해 절대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우리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 내면에 선천적으로 있던 시간과 공간의 틀, 그리고 인과율을 적용해서 보기 때문에 극히 제한적이고 개체화된 이미지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체화된 이미지란 하나의 사물이 수많은 다른 이미지로 분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표상이 지배하는 이 일상세계에서는 사물 그 자체, 혹은 세계에 속해있는 삼라만상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에 의해 지배된 세계입니다. 칸트는 시간, 공간, 그리고 오성을 선천적으로, 선험적으로 우리 내면에 이미 주어진 직관형식이라고 정의합니다. 직관이란 직접본다는 한자어입니다. 직관은 어떤 지성이나 이성의 매개없이 대상을 직접 감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하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실은 시간적으로는 그 대상의 순간적인 여러개의 이미지들을 잇달아 보는 것이고, 또한 공간적으로는 다른 대상을 옆에 두고 함께 보는 것입니다. 전자가 시간의 영향이고 후자가 공간의 영향입니다. 결국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의 틀이 없이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죠.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말하는 표상을 형성하는 이 시간, 공간, 인과율을 충분근거율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제시했습니다. 충분근거율은 삼라만상의 생성, 인식, 존재, 행위가 시간, 공간, 인과율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즉 표상세계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눈앞에 나타난 이 표상은 그 근저에 의지가 작용하여 가시화 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이기도 하고 동시에 의지로서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모든 표상은 의지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 혹은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며, 의지만이 사물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그런면에서는 세계의 본질은 표상이 아니라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의지라는 개념은 그 근원이 표상 즉 머릿속의 어떤 상조차 거치지 않고, 다시말하면 사물의 내부에서 우리의 어떤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이며 맹목적적으로 솟구치는 욕구와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개체를 어떤 주관과 객관의 형식도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을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간주하며 매순간 더 나은 행동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무리 결심하고 반성하더라도 변화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어떤 인과율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성질과 성향입니다. 인간의 심장박동도 근거율과는 관련이 없는 부교감신경에 의해 작동되고, 동식물과 광물체 역시 인과율과 전혀 상관없는 힘이 작용하여 존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는 기본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사물이 아니라 이렇게 표상화된 사물의 심연에 있는 사물 자체인 것입니다. 즉 인간, 동식물, 무기물의 생명력은 표상이 아니라 시간, 공간, 인과율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사물 그 자체의 힘, 즉 의지입니다.
표상의 세계는 마야의 베일를 통해 보는 허상의 세계이고 그 표상세계 너머에서 세계를 실제로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의지입니다. 참고로 마야는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신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이 실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을 말합니다. 마야는 참자아 혹은 존재의 본질를 상징하는 브라흐만과 대척점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표상과 의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철저하게 표상인 동시에 철저하게 의지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인간은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어떻게든 자본축적과 권력의 행사, 편리와 안온함이라는 감각의 충족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이 표상 세계에 뿌리박고 살아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의 세계가 표상세계의 배후에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우리를 조종하고 있음을 안다고 할지라도 의지는 삶에 대한 맹목적이고 가차없는 힘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생노병사의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시간, 공간,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운 순수주관을 통해 이 의지의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속성을 잘 알아차리고, 의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래 표상은 삶에의 의지가 객관화된 것, 가시화된 것인데 이렇게 객관화된 표상의 세계로부터 의지의 영향력과 폭군과 같은 속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표상으로부터 이념을 추출할 수 있는 자라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이념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같은 것으로서 의지가 객관화되어있는 적합도를 말합니다. 즉 이념이란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에서 시간과 공간, 인과율로부터 자유롭기 되기위해 갖추어야 할 객관적 적합도를 말합니다.
이념이라는 것은 의지가 객관화될 때 그 적절성을 만들어주는 것이고, 순수주관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엄격하게 구분되어있는 표상세계로부터 벗어난 것이고 동시에 맹목적인 의지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주관인 것입니다.
순수주관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만 작용하는 인식주관도 아니고, 맹목적이고 무근거적인 의지도 아닙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순수주관에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삶에의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 다시말하면 삶에의 의지를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주관은 일종의 자기부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주관과 객관이 구별이 없어진 상태, 불교에서의 자기에고로부터 벗어난 아공, 그리고 시간,공간,인과율로부터 벗어난 법공, 혹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에서 벗어난 해탈과 유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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