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성관
Автор: 조용한 문화유산 산책 考古學 Archaeology
Загружено: 5 окт. 2022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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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5오후촬영 Galaxy S22 Ultra
국립문화재연구원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편)
나주읍성(羅州邑城)
사적 337호. 전라남도 나주시 성북동, 중앙동, 서내동, 교동, 금성동, 남내동, 남외동, 삼도동 등 나주의 중심부를 감싸 안은 형태로 축조된 평지성이다. 지적도상 실측길이는 3,530m에 달하며 전체적인 형태는 남북장축의 타원형에 가깝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동점문(東漸門), 서성문(西城門), 남고문(南顧門), 북망문(北望門)을 설치하였으며 4대문 모두에 옹성을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 경에 남고문을 마지막으로 읍성 및 4대문이 철거되고, 대부분의 읍성터는 대지나 밭, 그 밖의 지목으로 등록되었다.
나주는 영산강 수계의 중하류에 해당하는 지역적 위치로 인해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농경사회 주민들이 일찍부터 정착하였다. 또한 영산강의 조운과 양호한 기후조건이 농업환경과 결합되어 일찍부터 전라도 서남부의 행정 및 군사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 일제강점기 통감부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특히 고려 현종 1년(1010)에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함락 당하자 현종이 나주로 몽진해 와서 9일 동안 머무르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현종 9년(1018) 행정개편 때 나주목이 되었다. 이로부터 나주는 조선시대를 거쳐, 1896년 나주관찰부가 폐지될 때까지 전주와 더불어 호남의 중심지로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말부터 계속되었던 왜구의 침입은 1370년대에 들어서 더욱 대규모화 되고 빈번해졌으며 내륙 깊숙한 곳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는 연안지역에 읍성을 축조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우왕 2년(1376) 7월에 왜구가 영산포와 나주에까지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정황을 통해, 고려 후기에는 이미 나주읍성이 축성되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정도전의 시문집인『삼봉집(三峰集)』에 기록된 문구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주읍성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이연년의 난을 평정할 당시의 기록인『고려사(高麗史)』열전 김경손 전에서 먼저 확인된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 보건데, 나주에는 고려시대에 문루와 현문 형식의 성문을 갖춘 토축의 읍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나주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성나주급보성(城羅州及寶城)’이라고 한『태종실록(太宗實錄)』4년 10월 기사에서 확인된다. 이 두 지역에서의 축성은 태종 4년 7월 왜선 33소의 전라도 침입으로 인한 조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앞서 언급한 나주읍성의 존재를 상기해 보았을 때 신축이 아닌 개축이나 재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나주읍성 개축에 대한 기사는 문종 1년(1451) 8월 병술조에서 확인된다. 이 글은 전라도 각 고을의 성곽에 대해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 정분(鄭??)의 계를 들어 의정부에서 작성한 보고문으로, 당시 나주읍성의 문제점을 보정하기 위해 개축작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주읍성은 이후 1년 만에야 비로소 공사가 시작되었으면서도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해 완공되지 못하고 훗날 나주목사 김계희(金係熙, 재임기간 : 1457년 8월∼1459년 11월)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후로도 읍성은 2번 이상의 중수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를 비롯한 여러 지리지들의 기록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나주읍성은 석성이며 높이 9척, 둘레 1,162보(『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 3,126척(『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금성읍지』), 9,966척(『문헌비고(文獻備考)』)이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현재까지 성벽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은 교동 67-2번지에서 서문지까지(서벽구간), 산정동 1-5번지 주변(북벽구간), 금성동 33-3번지, 금계동 110-8·148-1번지 담장일부(남벽구간), 성북동 8-15번지에서 8-21번지까지(동벽구간)이다. 이 가운데 동벽 일부구간은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되었는데, 조선시대 석축된 성벽과 더불어 석성벽의 내벽으로 이용된 고려시대 판축 토성이 함께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석축 성벽의 지반다짐부는 축조할 부분의 표토를 제거한 후 자갈돌과 점질토를 섞어 단단하게 다져놓았다. 기단부는 지반다짐부에서 130㎝ 정도 들여놓았으며, 대부분 성돌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상면을 치석하였다. 체성 외벽면석은 기단석에서 10∼30㎝정도 들여놓았다. 사용된 성돌의 크기는 두께 100㎝, 길이 160㎝ 정도로 바깥면(외벽면)만 치석하였다. 체성 외벽면석은 기단석 위에서 수직으로 쌓아올렸으며 상부로 가면서 성벽돌의 크기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돌을 끼워 넣어 각 단의 수평을 맞추었다. 기단석을 제외한 외벽의 잔존 높이는 160㎝로 2∼3단 정도 남아있다. 체성의 두께는 560㎝ 내외이며 성벽 안쪽 일부는 작은 돌로 채워 넣고 그 다음으로 흙을 넣어 다졌다. 고려시대 토성은 근대 건축물과 기타 부대시설에 의해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으나, 판축법에 의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노출된 토성은 기저부 한쪽에 석열을 배치한 후 명갈색점토와 암갈색점토를 번갈아 쌓아올린 것으로, 판축은 현재 5∼8개 층이 남아있으나, 구간에 따라 판축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토축의 석심열은 조선시대 읍성 내벽 하단부로부터 70㎝ 정도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석심열은 1단 1열로, 석재의 크기는 길이 30㎝, 너비 20㎝ 내외이다.
나주읍성의 4대문 중 남문인 남고문은 1993년에 복원되었으며, 동문인 동점문은 2002년 발굴조사된 후 현재 복원된 상태이다. 서문인 서성문은 2007년에 발굴조사된 후 복원 계획 중이다. 이 가운데 서문지의 발굴조사에서 성문지와 체성부, 그리고 옹성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문지에서는 둔태석 2개와 문설주, 문지석, 그리고 박석이 확인되었다. 노출양상으로 보아 성문의 전체 폭은 310㎝이며, 두 개의 문짝을 양쪽에 달아 밖으로 여닫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둔태석에는 지름 24㎝ 정도 크기의 구멍을 뚫어 확쇠를 씌워 놓았으며 둔태석 옆에는 문설주를 두었다. 육축부에서는 시기적인 차이를 보이는 2개의 유구가 겹쳐 노출되었다. 1차 육축부의 개구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상부 누각의 규모와 같다. 2차 육축부의 개구부는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양 측면 칸은 성벽을 확장시켜 위쪽 누각의 양 측칸을 받게 하였다. 육축 변화에 따른 체성확장 부분은 607㎝ 정도이다. 1차 육축부의 조성 방식은 체성 외면벽과 같이 기단석 위에 외벽면석(잔돌끼움쌓기)을 올린 형태이나, 2차 육축부의 조성 방식은 지반다짐이나 기단석이 없이, 당시 지표를 파 낸 뒤 성돌을 쌓아올린 방식을 취하고 있다. 1차 성문루 초석간의 한 칸 거리는 동서 230㎝ 내외, 남북 360㎝ 내외이며, 2차 성문루 초석간의 한 칸 거리는 동서 215㎝ 내외임이 확인되었다. 육축부 북쪽면에 연이어서 누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시설이 확인되었는데, 계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올라가는 형태이며 잔존 단수는 3단이나, 노출된 양상으로 보아 육축부나 누각과는 달리 계단의 위치와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축조할 부분의 표토를 제거한 후 자갈돌을 점질토와 섞어 단단하게 다져놓은 지반다짐 후 120㎝ 정도 들여서 기단석을 놓았으며 체성 외벽면석은 기단석에서 16∼22㎝ 정도 들여서놓았다. 체성 외벽면은 기단석 위에서 수직으로 쌓아올렸으며 상부로 가면서 성벽돌의 크기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돌을 끼워넣어 각 단의 수평을 맞추었다. 체성의 두께는 530∼600㎝ 내외이며 내부에는 흙과 잡석을 섞어 채워 넣었다. 옹성은 반원형 편문식이나 전체 평면은 모를 죽인‘ㄱ’자 형이다. 옹성의 측벽과 마주보는 체성부에 옹성 돌출부는 없다. 개구부 폭은 550㎝ 내외이다. 기저부는 조성하지 않았고, 기단석 위에 성돌을 올린 구조이다. 옹성 외벽면석은 기단석에서 20㎝ 정도 들여 놓았는데, 내외벽 모두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흙과 잡석을 섞어 채워 넣었다. 전체 폭은 720㎝이다. 옹성의 개구부 방향은 남쪽이다. 노출된 유구양상과 토층으로 보아 옹성은 체성을 쌓은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읍성 내부 시설로 3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나주객사지이다. 발굴조사 결과, 나주객사의 공간배치 원형과 더불어 시대에 따른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이전 시기에 존재하던 불규칙적인 건물 배치양상을 탈피하여 기본적인 정청과 양익헌을 갖춘 객사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조선후기에는 대규모의 정청인 현 금성관(錦城館)이 재건립되고 동익헌지, 서익헌지, 보도시설, 중문, 각종 부속 건물지와 외삼문 등이 건축되어 조선 전기와는 규모가 다른 정청과 양익헌을 갖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때 중문을 두어 객사 일원을 행례공간과 그 외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19세기에는 정청과 동서익헌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 외 공간은 이전과는 달리 3개의 영역으로 구획되었다. 행례공간은 출입보도시설을 제외한 정청의 전면에 박석을 깔아 공간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객사를 유지, 관리하기 위한 부속건물이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이를 내삼문과 중삼문으로 구획하였다. 중삼문에서 외삼문까지의 공간은 출입을 위한 보도시설을 제외하고는 어떤 시설도 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의도적이고 가속적인 파괴로 인해 나주객사는 급속히 해체되어 그 원형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삼국시대 토기편에서 근대까지의 유물들로, 대부분 층위나 위치의 구분 없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청자는 12세기상감청자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빠르게는 9∼11세기에 만들어진 해무리굽의 초기청자까지 확인되었다.(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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