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사회계약론’
Автор: 『인문교양심리철학』: 성필원
Загружено: 20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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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의 철학은 루소 개인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순탄치 못했던 그의 삶만큼이나 그의 철학도 순탄치 않다. 그의 삶과 철학에는 긴장감도 있고 심지어는 완전히 모순되는 점도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루소의 철학과 삶을 그토록 흥미롭게 만드는 것 같다. 루소는 기운 빠지는 말년을 보내기도 했지만, 가난뱅이에서 부자로 상승하는 활기찬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루소가 자기 아이 다섯을 태어나자마자 바로 고아원으로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그를 방탕한 난봉꾼으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루소의 철학은 이런 그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의 삶만큼이나 열정적이다. 그의 철학에는 약점도 있고 난제도 있다. 어쩌면 이런 보든 것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루소의 저서에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소는 자신의 저작들 때문에 체포영장을 발부받았으며, 그 책들이 불태워지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러나 지금 루소의 시신은 파리의 팡테옹에 경건하게 묻혀 있다. 루소의 사상은 인민주의 전체주의자와 자유주의자에 의해 거의 같은 정도로 채용됐고, 하루가 다르게 의제가 급변하는 시대를 사는 후세대들도 모두 루소 안에서 참으로 생각되는 것을 찾아낸다. 이런 게 가능한 것은 거칠고 변덕스러운 루소 철학의 본질때문일 것이다. 루소의 최고 역작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계약론』이다. 이 책이 그 이전까지의 사회계약론과 어떻게 차별화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이 책의 놀라운 가치가 이해될 것이다.
루소는 합리성뿐만 아니라 가끔 마음과 감정에도 호소하며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했다. 물론 그럼에도 루소는 분명 합리론의 전통 안에 있다. 양 요소를 결합해서 본다면, 루소는 이성적 낭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계약에 대한 논의가 국가에 입법권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토마스 홉스와 비슷하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의 논의부터 루소는 홉스의 주장과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이는 루소와 홉스가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에서 서로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사람들은 선하게 태어났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다. 루소의 요지를 잘못 해석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조금 주의해야 한다. 초기에 발표한 논문에서 루소는 문명을 옹호하고 환영하는 것 같다. 그러나 1755년 출간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모든 과학의 근원이 미심쩍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은 점성술이라는 미신에 뿌리를 두고 있고, 수학은 큰 욕심 때문에, 나왔다는 것이다. 통치받지 않는 인간은 순박하고 자유로우며 고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국가가 생기면서 이 세상에 타락과 불평등, 노예 제도가 탄생했다. 물론 이런 수사학적이고 과장된 논조는 『사회계약론』에서 가면 약간 진정되고 줄어든다. 그러나 본래의 인간,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은 홉스가 말하는 야만인과는 다르다는 견지는 유지된다. 또한 문명에는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는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계속된다. 그러나 루소의 성숙한 견해를 이해하려면 많은 단서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루소에 대해 성급하게 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루소가 우리에게 사회라는 비열한 치장을 벗어던지고 자연상태로 돌아가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루소의 취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는 부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아도 된다. 실은 루소는 문명화된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본래의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도덕관념이 없는 자기 보존의 삶을 도덕적인 삶, 더 고귀한 자유로 바꿀 수 있다. 단순히 힘으로 물건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법적인 자격을 가질 수 있다. 게다가 도덕적 자유도 얻을 수 있다. 즉 맹목적 욕구에 몸을 맡기지 않고 선택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을 “어리석은 유한의 동물” 대신 “지성의 피조물인 사람”이 되게 한다. 이런 말은 사회는 타락한다는 단순한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읽는 이들이 루소는 문명이 타락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게 될 소지가 있는 것은 바로 루소가 사용하는 표현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루소는 “사람은 태어날 때는 자유롭지만” “어디에 있든 사슬에 묶여 있다”며 화를 낸다. 이를 문명사회의 구속이나 타락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애초부터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는 것 같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렇게까지 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집필하는 목적을 밝히면서 이런 바람을 피력한 바 있다. “나의 목적은 정치적인 사회에서 통치권의 정당하고도 확실한 원칙, 즉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법을 이상적인 법의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그대로 생각하는 원칙이 존재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루소는 홉스나 로크와는 달리 가언적 철학에 몰두한다. 루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국가를 합법화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합법적인 국가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이다. 특정한 인간 본성의 개념이 주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국가는 어때야 하는가? 혁명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루소의 생각에 그토록 매료되는 이유는 바로 루소의 철학이 가진 이런 가언적인 면이다.
루소의 사상 안에는 어떤 인간 본성 개념이 들어있을까? 사람이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루소의 생각은 이미 알고 있지만, 이는 사람에게 선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는 뜻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루소에게 자연상태의 인간은 도덕관념이 없으며 법이나 윤리 원칙이 아니라 욕구와 본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보존의 전 반성적 명령에 따른다. 또한 이 모든 것과 관련된 일종의 내재된 자유가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을 직접 돌보기에 자신의 주인인 것이다.
초기 저술에서 루소는 고결한 미개인이 몰락한 이유가 사유재산이 출현한 탓이라고 주장한다. “최초로 한 구역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여기는 내 땅이다”라고 말한 사람, 사람들은 단순해서 자신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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