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 52주년 예비군의 날] 예비군 창설 배경과 발전상
Автор: KFN
Загружено: 3 апр. 2020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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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뉴스] 2020.04.03
[창설 52주년 예비군의 날] 예비군 창설 배경과 발전상
매년 4월 첫째주 금요일은 예비군의 날입니다. 예비군은 유사시를 대비하는 예비전력으로, 국가 안보의 중요한 자산인데요. 올해로 창설된 지 52년을 맞은 예비군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정동미 대윕니다.
우리나라 예비군의 시초는 1948년 창설된 호국군입니다. 당시 국군조직법에 따르면, 국군은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편성돼있었는데요. 육군 호국군이 약 10만 명, 해군 호국군이 만 여 명 수준이었습니다.
호국군은 생업에 종사하며 필요한 군사훈련을 받았는데요. 하지만 1949년 8월 우리나라 병역법이 지원제에서 징병제로 바뀌며 1년만인 1949년 8월에 해체됐습니다.
호국군의 자리는 청년방위대가 대체하며 1950년 5월엔 20만 명을 민병으로 운용했지만 6·25 전쟁으로 정규군과 완전히 통합됐습니다.
이후 1961년 12월 향토예비군 설치법이 제정되었지만, 예산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예비군 부대는 편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북한의 도발로 예비군의 필요성이 강조됐고 지역방위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1968년 4월 1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일하면서 싸우자”라는 모토 아래 164만 여 명 규모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됐습니다.
같은 해 5월엔 전국의 지역과 직장 예비군에 무기가 지급됐고 1971년부터는 군에서 예비군의 교육과 훈련을 전담하며 전력 강화가 가속화됐습니다.
우리 예비군의 활약은 국가 위기 때마다 빛을 발했는데요.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1998년 남해안 반잠수정 사건까지 예비군은 무려 91번, 연인원 40만 명이 동원돼 작전에 참여했고 특히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때는 추석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동원율이 무려 85%에 육박하며 예비군의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향토 예비군에서 지금 사용하는 명칭인 예비군으로 바뀐 건 2016년인데요. 향토 예비군설치법이 예비군법으로 개정되며 향토 예비군은 예비군으로, 향토 방위작전은 지역방위작전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창설 52주년을 맞은 지금, 국방개혁 2.0이 추진되면서 예비군은 유사시 정규군과 함께 국가방위 태세의 한 축을 담당하는 더욱 중요한 조직이 됐습니다. 윤진영 국방대학교 예비전력 연구센터장의 말 들어보시죠.
예비군의 역할 확대와 변화는 현재까지의 예비군은 상비전력의 보조 전력으로 인식됐습니다. 그러나 국방개혁 2.0에서는 상비전력 감축의 대안으로 예비전력을 정예화하고 상비전력의 동반자로서 역할을 정립하고 상비군과 함께 전쟁을 억제하고 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상비군의 동반전력으로 그 역할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예비군.
국방개혁 2.0과 함께 앞으로 더욱 강하고 정예화된 예비군으로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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