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전술적 작전이자 거함거포의 종말, 진주만 공습!//조종의 NAVY썰(해군 이야기)
Автор: 조종 JOJONG Ch (Not control)
Загружено: 14 янв. 2020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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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기습#항공모함
일본은 왜 무모한 진주만 공습을 강행했던걸까? 그에 대한 이유를 저와 함께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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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일반인들까지 다 알고 있을정도로 유명한 군함의 종류이다. 다른 군함들의 경우 미사일 혹은 대포를 사용하여 공격하지만 항공모함은 그것과는 달리 항공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언제든지 이륙시킨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런 항공모함이 막 태동한지 얼마되지 않던 시절, 커다란 대포로 적 군함을 공격해야한다는, 이른바 거함거포주의가 팽배했었고, 이런 거함거포 사상에 정점을 찍은 군함이 바로 야마토급 전함이었다. 전함이 주력이었던 시절 항공모함은 과연 어떤 계기로 주력의 자리를 빼앗게 된것일까? 오늘 이야기 할 네이비썰은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이자, 최고의 전술적 작전. 진주만 공습 이다.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한 이유를 알려면 1931년 중일전쟁까지 올라가게 된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과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데, 역사를 조금만 뒤져보면 알겠지만 전쟁은 정말로 돈과 자원이 많이 들어간다. 석유,섬유,고무등 막대한 양의 자원들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듯 투입되기 시작했으며 일본은 안정적으로 이 자원을 공급해줘야 전선유지가 가능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모든 자원을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는것이 아닌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었는데, 그 중 석유는 미국에서 90%나 수입할 정도로 전량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자국의 상황은 무시한채 중국 국민당 제거에만 신경쓰던 일본 군부는 자제력을 잃어 폭주하고 있었고, 일본은 서서히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본격적으로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일본또한 독일이 굴복시킨 나라의 식민지들을 차례 차례 점령할 계획을 수립한다. 네덜란드령이었던 인도네시아에 압박을 넣어 자국에 석유를 공급하도록 요구했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를 공격하여 중국의 보급로를 위협하는등, 중립국 선언을 하였다고 했으나, 미국 입장에서도 더 이상 두고 보기는 힘든 상황에 이른것이다. 결국 미국은 영국, 중국, 네덜란드 망명정부와 함께 ABCD 포위망을 형성하며 당장 중국에서 발을 빼지 않으면 더 이상의 전략자원 수출은 없을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이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전략자원, 그 중에서 석유공급라인이 사실상 끊어지는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입장에서는 중국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이미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이대로 물러난다면 지난 날의 사용한 전비가 모두 헛수고가 되는건 물론이며, 철군하는데 드는 비용까지 무지막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40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와 철강 수출 제한조치를 내렸고, 이에 중국에서 물러날 수 없는 일본은 새로운 석유 공급처가 필요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의 자원지대를 탐내게 된다. 문제는 이 자원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서는 필리핀 주변 해역을 지나야했고,이 주변해역은 필리핀의 종주국인 미국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거기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 1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해 주면서 결국 일본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당시에 일본도 미국의 국력을 모르는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자신감에 넘쳤는데 그 이유는 러일전쟁때도 비슷한 국력차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쓰시마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한번의 전투로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 조선반도에서의 영향력까지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쓰시마해전은 일본에서 매우 신성시 되는 사건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거함거포 함대결전 사상이 군부에 기본적인 전략 방침이 된 원인이 된다. 그래서 일본은 그때처럼 미국과의 결정적인 한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자신들이 유리한 협상테이블로 미국을 끌어들인다는 계산이었다. 이에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 태평양 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진주만을 기습한뒤, 빠르게 종전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 작전 계획안은 처음에는 너무 무모하기에 반대를 했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지위와 카리스마로 이 계획안은 통과되었고 머지않아 작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진주만 공습 작전에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이러했다. 먼저 17일에 소류와 히류로 이루어진 제2항공전대와 아카기가 히로시마 항구에서 출항. 같은 시각 쇼카쿠와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제5항공전대가 큐슈 북서부 벳푸에서 출발하여 쿠릴열도에 있는 히도카프만으로 출항하고, 카가는 하루 지난 뒤 사세보에서 히도카프만으로 출항한다. 이 후 히도카프만에서 보급을 받은 뒤 11월 26일에 출항, 곧장 동쪽으로 항해를 한 뒤 날짜변경선을 지나 남쪽으로 변침해, 하와이 북쪽 370km 해상에 도착한 뒤,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를 출격시켜 진주만에 정박해있는 미 태평양 함대를 격파한다는 계획이었다. 도쿄와 6,000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곳을 공습한다는것도 매우 대담한 작전인데 거기에 당시에는 매우 생소했던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사용하는거기에 작전 구상 과정에서 난제가 많았다. 가장 큰 난제가 진주만의 수심이 어뢰를 투하하기에는 너무 얕다는것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격완화장치와 수평안전장치를 어뢰에 장착했고, 그걸로는 부족해서 일본내에서 손꼽는 에이스 파일럿들이 초저공 비행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중간에 작전이 들키면 안됐기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포함한 장교들은 보안에 매우 엄격했다. 히도카프만으로 집결하였을때부터 모든 함대는 무선침묵을 하였고, 이는 진주만 공습을 할때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계획한 항로대로 진주만을 향해 항진하였고 마침내 12월 2일, 진주만 공습부대는 '니이가타야마오노보레'라는 전보를 받게 된다. 이는 진주만 공습의 최종 승인 암구호였고, 몇시간 후 공습부대는 날짜변경선을 지났다. 그리고 12월 7일 오전 6시 5분 나구모주이치가 이끄는 진주만 공습부대의 1차 공격대가 갑판에서 날아올랐고 한시간 후, 2차 공격대가 날아올랐다. 이들은 약 두시간을 비행한 뒤, 진주만에 도착하였고, 진주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진주만을 공습하기 위해 투입된 공격대들의 계획은 이러했다. 1차공격대는 오하우섬 좌측으로 선회하여 진주만으로 들어가며, 2차공격대는 우측으로 선회하여 진주만으로 들어가는것이었다. 이때, 부대를 나누어 일부 급강해 폭격기 및 수평폭격대대는 비행장을 공습하여 진주만 뿐만이 아닌 오하우 섬에 있는 기지를 무력화 시키는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기지는 바로 비행장들이었다. 휠러 비행장을 시작으로 에바, 카네오헤, 벨로우즈 비행장이 공격받았고, 수많은 항공기들이 불길에 휩쌓였고 유류 저장고는 유폭이되면서 비행장 일대가 지옥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진주만 또한 불길에 휩쌓였는데, 일본의 항공대대는 사전에 입수받은 정보를 통해 타격을 해야할 군함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타격했다 이때 일본은 전함을 중심으로 타격했는데, 미 태평양 주력함이었던 전함 오클라호마,애리조나,캘리포니아,웨스트버지니아,네바다,펜실베니아,테네시,메릴랜드가 주요 타격 대상이었다. 그리고 난 뒤 헬레나등의 경순양함과 구축함들 또한 폭격을 시도하면서 전투불능이 되었다.이때 피해를 입은 군함들을 정리해보자면 전함8척, 경순양함3척, 구축함3척에 항공기 약 188기가 손실되었다. 특히 전함 애리조나의 경우 수평폭격기의 포탄이 탄약고를 관통해 탄약이 폭발, 결국 유폭이 되어 침몰해버렸다. 그렇게 공격을 마친 1,2차 공격대가 함대에 돌아와 착함을 시작했고, 오후1시쯤 나구모는 무선침묵을 깨고 도쿄에 공습을 성공했다고 타전했다. 한편, 기동부대의 함상에서는3차 공격대를 구성해 유류저장고를 공격해 미 태평양 함대를 움직일 수 없게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3차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문제점이 많았다. 마지막 함재기가 착함한 시간은 오후 12시 15분이었으며, 이 날 하와이의 일몰시간은 약 오후 5시 12분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함재기를 수용한 뒤 재보급과, 재급유,파일럿들에게 유류 저장시설의 위치 및 목표할당 그리고 귀환까지, 이 모든 사전, 행정적 업무와 작전의 실시까지 5시간안에 수행해야한다는건,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더군다나 공습 당시 항공모함의 모습은 한척도 보이지 않았고, 어디있는지 몰랐던 이 항공모함들은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고, 일본의 항공모함들의 위치를 찾고있었다. 히토카프만에서 출항할때 나구모주이치는 반드시 모두 무사히 살려서 돌아오라는 상부의 명령을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함전문가였던 나구모 주이치가 공습부대 사령관이었기도 했다. 거기에, 이미 2차 공습까지 진행을 했기 때문에 수비대는 방어 태세를 갖췄고 기습의 효과는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나구모는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때 더 이상의 진주만 타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함대를 북동쪽 방향으로 돌렸다. 그렇게 작전은 종료되고, 진주만 공습부대는 일본으로 귀환하였다.이 이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바로 의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미국은 전시체제에 돌입하여 이후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진주만 공습은 전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때, 기존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막 태동한 항공모함의 집중운용의 엄청난 위력을 맞본 미국은 이 이후 전함 중심 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항공모함 중심 교리로 갈아탔다. 그리하여 하루 아침만에 함대의 꽃이자 주력이었던 전함들이 하루아침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2선급 전력으로 추락했다. 반면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항공모함을 통한 기습을 했는데도, 여전히 거함거포 함대결전 사상에 매달렸다. 항공모함을 통한 기습도 함대 결전시에 더 유리하게 상황을 만드는 도구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다.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전술, 전략은 일본이 먼저 실행에 옮겼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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