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성의 숨겨진 스토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Автор: 공동선TV
Загружено: 6 окт. 2021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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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공동선TV
#추상 사이에 놓인 윤희의 사랑
#이동윤 / 작가 겸 영화 큐레이터
#윤희 에게는 한국 영화에서 쉽게 만나기 힘들었던 중년의 #여성성소수자 이야기를 담아낸다. 20년 전 첫 사랑과 아픈 이별 후 한 평생 그 사랑을 간직하며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던 ‘윤희’가 그 주인공이다. #성소수자 중에서도 거의 다뤄진 적 없는 #중년여성 성소수자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이를 고민하는 과정을 역사화 한다.
일반적으로 #성정체성 을 깨닫는 시기라고 알려져 있는 사춘기 시기로부터 오랜 세월 벗어나있기에 중년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성정체성에 대해 이해하려면 결국 그녀가 정체화 하는 과정 전체를 살펴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윤희에게’가 묘사하고 있는 #윤희 의 성정체화 과정은 윤희에게’를 퀴어영화로 바라보기 위해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윤희의 고통의 근원, #전환치료
윤희는 고등학교 시절 첫 사랑인 쥰을 만났다. 마지막 편지에서 밝힌 내용에 의하면 그 시절은 윤희에게 가장 행복한 한때였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이후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고 이것이 결국 쥰에게 이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밝힌다. 윤희가 (발신 미정인) 편지에서 밝힌 내용은 윤희의 정체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특히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 뒤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는 과거 사건은 그녀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다. 윤희는 그 뒤로 결혼을 선택했고, 딸을 낳은 뒤 이혼을 했는데, 이 모든 그녀의 선택은 자신의 성정체성과 갈등을 겪는 과정을 드러낸다. 윤희가 어렸을 적 받았던 전환치료는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다.
전환치료는 성소수자를 비성소수자로 바꾸기 위해 이뤄지는 모든 치료행위를 일컫는다. 심리 상담과 정신과 치료뿐만 아니라 학교, 종교 영역에서 이뤄지는 모든 상담 영역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환치료는 성소수자 당사자의 인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낸다. 내가 부족하고 잘못됐고 병든 자라는 인식, 경험하고 느끼는 모든 행동과 감정들을 부정하고 지워야 하는 고통을 심어줌으로서 성소수자로서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증오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자기 분열적 상태는 성소수자를 비성소수자로 ‘치료’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신경/정신증적 증상을 야기하도록 만든다. 이미 1974년 미국정신의학회에서는 DSM-2 항복에서 동성애 항목을 진단명에서 삭제 했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가 되자 최근 2016년 세계정신의학회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입장을 성명서로 발표 했다. 미국에서는 현재 각 주에서 전환치료를 명백한 불법 행위로 규정해서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음에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전환치료 행위가 사회 곳곳에서 발생되고 있다.
윤희는 바로 그러한 전환치료의 피해자 였다. 그래서 사랑했던 쥰과 이별을 선언해야 했고, 오빠가 소개해준 남자와 결혼해야 했고 아이도 낳게 된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새봄이라 지은 것에서 그녀의 속마음이 전해진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은 차가운 얼음처럼 얼어 붙어있는 겨울이지만 딸 만큼은 따뜻한 봄날 같은 계절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녀는 결국 결혼과 출산을 선택했지만 분명 알았던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위한, 옳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추상화 되어버린 윤희의 현재적 고통
극 전체를 관통하는 윤희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녀의 전환치료 경험이 중요한 단서임에도 영화는 이를 후반부 짧게 언급할 뿐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윤희의 현재적 고민과 갈등에 주목한다. 전남편은 윤희를 “옆에 있는 사람들을 외롭게 만드는 자”로 정의한다. 딸인 새봄이도 부모가 이혼할 때 아빠가 아닌 엄마를 선택한 이유를 “더 외로워 보여서 혼자서 못살 것 같았어”라고 설명한다.
영화 전반에서 환히 웃는 모습 한 번 보여주지 않는 윤희의 태도는 충분히 묵시록적이다. 그녀의 어둠과 암울함에는 어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아우라가 형성되어 있다. 심지어 엄마의 과거를 알고 옛 애인과의 조우를 계획하려는 새봄까지도 그녀의 곁에만 머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듯 여겨지는 윤희의 태도를 단순히 마지막 편지 하나에 의존해서 이해하려는 것이 조금 버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랑했던 쥰과의 이별,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결혼해야 했던 선택, 진심으로 원하는 미래를 꿈꾸지 못한 채 직원 식당에서 휴가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현재적 삶의 모습들만으로 그 고통의 무게를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결국 윤희가 편지를 통해 밝히는 전환치료를 이해하는 것이 그녀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지만 영화는 고통의 원인을 다루지 않고 현재적 상태에만 집중함으로서 그녀의 고통을 추상화 시켜버린다. 새봄이 조차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정도로 굳건한 성처럼 쌓아 올린 그녀의 고통의 벽 앞에서 관객조차 거리를 둘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윤희의 고통이 추상화 되어 있다는 점은 마지막 쥰을 만나는 순간 극대화 된다. 서사에서 윤희는 쥰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한다. 쥰의 고모가 보낸 편지를 받았던 새봄이 답장을 보냈고 이를 보고 다시 편지를 쓴 쥰의 편지를 윤희가 받았을 때 그녀는 어렵게 옛 앨범을 들춰낸다. 어쩌면 잊으려 했을 과거의 기억이 다시 소환 됐을 때, 그녀는 새봄의 제안에 따라 일본 여행을 결정한다.
쉽지 않게 결정된 여행에서 윤희는 쥰의 집 앞을 찾아가지만 마치 숨어서 담배를 펴야만 했던 과거처럼 건물 뒤로 숨어 버린다. 그리곤 카페에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사랑하는 연인과의 행복한 한때를 상상한다. 이와 같이 윤희와 쥰의 만남을 고대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윤희에게의 서사는 관객의 관심을 모으고 극 중 인물들에게 매력을 느끼도록 만드는 서사적 전략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그 서사적 전략이 완성되는 윤희와 쥰의 재회를 짧게 축약시켜 버린다. 심지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짓는 윤희와 쥰의 모습을 새봄이 숨어서 지켜봄으로서 재회의 순간조차 타자화 시킨다. 더 큰 문제적 장면은 바로 다음 장면이다. 오타루 강가를 산책하는 윤희와 쥰은 서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며 “오랜만이다” “참 오랜만이네”라는 텅 빈 말들만 허공에 날린다.
그리곤 곧바로 페이드아웃 되어 그녀들의 만남을 매듭짓는다. 서사 전반을 통해 두 사람의 재회를 고대하도록 만들었던 전략은 단 두 씬을 통해서 보상된다. 윤희의 고통이 만약 사랑했던 자와의 이별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녀들의 만남은 충분히 관객들에게 보상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후 자아를 찾아 나아가는 윤희의 모습도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희가 자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쥰과의 만남을 통해서 부정하고 지워버렸던 감정들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순간을 생략하고 대신 윤희의 편지를 통해서 그 순간 있었을 일들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왜 영화는 굳이 둘의 만남을 생략하고 축약했어야 했을까?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없었다.
보편적 사랑과 특수한 사랑 사이에 놓인 #동성애
윤희를 연기한 김희애씨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윤희의 사랑이 ‘보편적’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윤희의 사랑을 보편적인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이중적 모순점을 담지한다. 모든 사랑이 평등하고 동일하다는 점에서, 성소수자들의 사랑 또한 특별한, 특이한, 기이한 사랑이 아닌 비성소수자들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윤희의 사랑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보편성은 특수한 개별적 차이들을 지워버린다.
그 차이들은 성소수자들의 사랑이 비성소수자들의 사랑과는 달리 어떤 차별과 폭력 속에 놓여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퀴어’라는 말이 지칭하는 것처럼 성소수자는 특별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성소수자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것은 비성소수자와의 다름을 강조하고 구별짓기 위함이기 위한 전략이 아닌 오히려 성소수자를 억압하고 구별짓고 지우려는 사회적 폭력 속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전략이다.
성소수자의 사랑이 보편적인 사랑으로 인식되는 것이 최종적 바람과 목표라면, 이를 위해서 성소수자의 사랑은 반드시 특별한 사랑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성소수자들의 사랑이 겪어야 하는 억압과 차별을 해소하고 평등한 조건 속에서 보편적 사랑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희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사랑은 특별하다. 하지만 그녀의 특별함은 존중 받지 못했고 억압되고 부정되고 지워져 버려야 했다. 지운다고 지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성정체성을 한 평생 끌어안고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들조차 밀어내야 했던 그녀의 고통은 어느 누구도 쉽게 이해한다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서사 전반을 통해서 그녀의 고통에 집중해야 했떤 영화적 태도는 옳았을지 모른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우리가 그녀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고통의 근원 또한 선명하게 서사화해야 했다. 마지막 편지에서 짧게 밝힌 내용만으로 윤희의 고통을 이해하기에는 한국 사회에서 ‘전환치료’에 대한 인식조차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윤희와 쥰의 만남을 통해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닫혀 있던 마음을 열고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자신감을 얻는 과정을 관객들 또한 체험해야 했다. 그래야 딸과 함께 서울로 이주를 결정한 윤희의 선택이 보다 실체적 힘을 지니고 관객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영화는 이를 간과함으로써 윤희의 고통까지도 추상화시킨 오류를 범한다.
분명 윤희의 고통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정확히 어떤 고통인지를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칫 현실 속에서 꾸준히 사랑을 인정받으려 투쟁하는 성소수자들의 목소리까지도 추상화시키는 길이 될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결국 ‘윤희에게’는 하나의 성취와 함께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퀴어영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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