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거진천 사거용인 - AI 수필 낭송
Автор: 느티나무 그늘 아래
Загружено: 18 сент. 2022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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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 사거용인
옥창열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살았을 때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산다’는 뜻이다. 간혹 ‘살았을 때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용인분들이 설화說話에서 생긴 말일 뿐이라며 발끈한다.
설화는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모두 진천과 용인 땅에 살던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용인으로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고 과부가 된 여인이 진천으로 재가하여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들이 서로 모시려고 하자 원님이 생거진천 사거용인 하라고 판결했다는 식이다.
진천을 지나치다 보면, 초입과 산, 장삿집 여기저기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표지석이나 팻말이 보인다. 실제로 진천은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예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고 전한다. 그럼, 용인은 궁벽하고 살기 힘든 고장이었나?
용인시 양지면에는 ‘들통곡 날통곡’이란 전설이 전해온다. 어느 원님이 부임하면서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산골로 귀양 보내나!” 하고 통곡했는데, 장작불에 쌀밥을 먹을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데다 인심까지 좋아서 임기를 마쳤을 때는 섭섭해서 통곡했다고 하여 ‘들통곡 날통곡’이란 말이 생겼다는 거다.
어느 쪽이 살기 좋은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인이 수도 서울 코밑이라 오늘날 진천에 비할 바 없이 금싸라기땅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용인에는 명문 사대부들의 무덤이 수없이 많은데, 이것도 서울에 가까워서 그런 듯하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일 장군, 병자호란 때 잡혀간 오달제, 홍길동전 저자 허균과 그의 아버지 허엽, 수원 화성을 축조한 채제공, 반계수록을 저술한 실학자 유형원,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를 지은 남구만이 용인 땅에 잠들어 있다.
내가 사는 수지구 상현동에는 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과 그의 묘가 있다. 버스를 타고 지나오면서 바라보니, 도학 정치를 강조하다 임금의 미움을 사서 허망하게 사약을 받은 선비의 무덤가에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이매창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삼절扶安三絶’로 꼽히던 유희경이 이곳을 찾아 참배한 후 시 한 수를 남겼다.
“사모하는 마음 심곡을 찾으니/가을 산 나뭇잎이 누렇게 물들고/낡은 비석에는 풀 넝쿨이 덮였네./해묵은 무덤에 저녁 해 쓸쓸하구나./도덕은 천년에 밝게 빛나고/문장은 한 나라에서 으뜸이었나니/분향하고 술잔을 올리는데/슬픈 눈물 옷깃을 적시네.”
수지구 고기동은 계곡이 좋아 여름 유원지로 이름난 곳인데,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과 이순신의 조카 이완 장군의 묘가 있다. 이완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분전했고, 정묘호란 때 전사한 분이다.
고기동에는 이순신 장군의 조부인 이백록 공의 묘도 있어서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이곳이 장군의 친가 쪽 고향이란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고, 장군이 묻힌 아산은 외가 쪽 고향이었다. 이래저래 역사의 숨결이 펄떡이는 고장이다.
제3 수필집 『워낭 소리의 추억』(2021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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