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사나, 제3수행법, 제4수행법, - 보이는 것이 있고 나타난 것이 있고 더듬아 들어 들어갈 것이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정법이 아님. 661(전강 27주기 02.01.14)
Автор: 용화선원: 송담스님
Загружено: 2 нояб. 2022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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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661 전강선사 27주기 추모재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무술년 11월 16일에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탄생을 하셨습니다.
16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셔 가지고, 같이 공부하던 도반이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보고 무상을 뼈아프게 느끼시고서 직지사 선방으로 그 어린 나이로 가셨습니다.
어떻게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던지 23세에 견성(見性)을 하시고, 전국 6대선지식을 찾아가서 다 인가를 맡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25세에 만공 대선사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으셨습니다.
그 뒤로 60세가 되도록 전국 유명한 선원에 조실(祖室)로 추대를 받아 가지고 학자 제접(提接)을 하셨습니다. 63세에 여기 인천 주안 용화사—조그만한 토굴인데—여기에 ‘법보선원’이라고 하는 선원을 개설을 하시고 학자 제접을 하셨습니다. 72세에 용주사 중앙선원을 개설하시고 학자 제접을 하셨습니다.
그 뒤로 인연 따라서 찾아오는 선객(禪客)들을 제접하시고, 77세에 갑인년 12월 초이튿날 열반하실 때까지 한결같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제창을 하시고 열반을 하셨습니다.
열반하신 그날도 법상에 올라가셔서 설법을 하시고 점심 공양을 드시고서 열반(涅槃)에 드셨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어려서부터서 출가하시고, 출가하셔 가지고 평생 동안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선원을 개설해서 학자 제접을 하시면서도 철저하게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지어서 가난하게 사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때에 경제 사정이 퍽 어려웠었고 전국에 수좌(首座) 스님네들도 모두가 다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속에서 정진을 했었습니다.
정화(淨化) 후로 수좌 스님네들이 모다 여기저기 절도 맡고 그래서 많이 스님네의 생활이 옛날에 비해서는 윤택하게 되었습니다마는,
원래 부처님께서 출가할 이는 바리때 하나와 소가사, 중가사, 대가사—가사(袈裟) 세 벌로 일생 동안을 나무 밑이나 바위 위에서 지내고, 걸식(乞食)을 하면서 하루에 한끼씩만 먹고 수행을 하되, 병이 나면은 황룡탕(黃龍湯)을—자기 오줌을 또 도반의 오줌을 받아서 먹으면서 그것으로써 병을 고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를 의지해서 수행하는 것을 바로 성인이 될 종자라 해서 ‘성종(聖種)’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그것이 바로 철저하게 가난하게 사는 법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구(比丘)다, 비구니(比丘尼)다’하는 ‘비구’란 말은 인도 말로 ‘얻어먹는 사람이다, 걸사(乞士)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은 얻어서 먹고, 법(法)은 선지식(善知識)한테 법을 듣고 법을 빌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철저하게 무소유로 일생을 살도록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가르키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걸식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그렇게는 못하나마 부처님의 그러한 무소유의 가난한 생활을 정신적으로는 항상 잊지 않는 가운데에 수행을 해 가는 것이 우리의 본분(本分)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정말 실천하신 분이 바로 전강 대종사이셨습니다. 열반을 하셨을 때 옷 한 벌 성한 것이 없었고, 학자를 제접을 하시면서도 그렇게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식량도 넉넉허지 못하고 김장할 때도 김장할 거리가 없었고, 장을 담을 때에도 메주를 쓸 콩도 없었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여기저기서 법문을 청하면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절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청하는 대로 가셔서 법문을 하시고 거기서 여비(旅費)를 봉하면은 그걸 가지고 와서 살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우리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우리가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고 수행할 수 있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러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열반하실 때까지 십년 계속해서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일생 동안 수행하신 것과 선지식과 법담(法談)을 해서 인가를 받은 것과 모든 그런 일대기 법문, 그리고 인연 따라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 새벽마다 어떤 신도가 녹음기를 기증을 해서 그것을 녹음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 녹음해 놓으신 테이프(reel tape)가 지금은 시디(CD)로 해서 잡음도 안 나고 잘 들을 수 있게 되았습니다마는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테이프를 사 가지고 그 녹음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열반하신지 27년이 되었지마는 그 녹음 법문(錄音法門)에 의해서 ‘우리는 어떻게 공부를 해 가야 바르게 하는 것인가?’ ‘수행인은 마땅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구구절절이 간곡한 법문을 남겨주신 것이 비록 열반을 허셨어도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그리고 우리의 도량에 조실 스님이 살아 계신 걸로 알고 수행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때 여기 용화선원은 주안 염전 가에 조그마한, 한국에 그렇게 작은 절은 지금은 찾기가 되려 어려울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절에서 용화선원을 개설해 가지고 학자 제접을 시작을 하셔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정진하고 법문 들을 수 있는 이러한 도량이 되도록 다 해 놓으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조실 스님의 그런 유지를 받들어서 그 법문에 의지해서 이렇게 이런 도량이 된 것뿐이고,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에 의해서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이 법보전(法寶殿) 안에 만년위패(萬年位牌) 제도를 창설하셨습니다.
용화사 법보선원을 지어서 스님네와 신도님네들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시고, 만년위패 제도를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제도할 수 있는—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서 왕생(往生)하실 때까지 편안한 영가(靈駕)의 안주처를 맨들어 주시고.
여기에 만년위패를 모시면은 영가들이 여기에서 행해지는 모든 법요식에 직접 참석을 하시고 법문에 의지해서 영가의 몸으로서 마음을 닦아 가다가 그러다가 인연이 도래(到來)하면은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왕생하시도록 그러한 제도를 여기에 마련해 주셨습니다.
선망부모를 좋은 곳으로 천도해 드리려는 여러 신도님네들의 정성에 의해서 그래서 이 용화선원은 오늘도 이렇게 큰 부족함이 없이 이렇게 선원을 운영해 나가고 정법(正法)을 선양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께서는 일생 동안을 ‘어떠헌 법을 가지고 제창(提唱)을 하셨느냐?’하면은 거두절미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한결같이 제창을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은 많은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들으시고 또 테이프를 소장하고 계신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어느 법문을 들으나 그 요점은 ‘활구참선’입니다.
요새 참선법이 많이 전국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 선양이 되고 있습니다마는 진정한 의미의 활구참선법은 듣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근자에 비파사나다 또 뭐 제3 수행법이다 해 가지고 동남아 모다 그런 데에서 그런 수행법이 흘러들어 와 가지고 많은 신도들 그리고 스님네 가운데에도 그런 데에 눈을 팔고 있는 분이 있단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여러분이 금강경을 보신 분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연등불 앞에서 얻은 바가 있어서 내가 석가모니불로 출세하리라고 하는 수기(授記)를 받았느냐?” 수보리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이 여러분은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연등불소(燃燈佛所)에서 얻은 바가 있었다면 석가모니불로 출세할 수 있다고 수기를 주시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요새 비파사나니 무슨 제삼 수행법이니 한 것은 자꾸 해 가다 보면 보이는 것이 있고, 얻어지는 것이 있고, 진취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깨달을 때까지 보이는 것이 있을 수가 없고, 나타난 것이 있을 수가 없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있을 수가 없고, 얻어지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얻을 것이 있고, 보일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도(邪道)라고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엄격한 규정을 하셨고, 역대조사(歷代祖師)도 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제3 수행법이니, 제4 수행법이니 해 가지고, 보이는 것이 있고, 나타난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정법(正法)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을 증명으로 모시고 강력하게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 까닭은 그렇게 해서 설사 무엇이 얻어지고 알아지고 보이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조실 스님의 추모재를 맞이해서 이런 말을 언급하게 된 것은 심지어 각 선방에도 그러한 풍조가 직접 간접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정법을 망가트리고, 정법을 좀먹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강경하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실 스님께서 일생 동안 선양하신 활구참선과 직접 관련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조실 스님의 추모재를 기해서 이런 말씀에 대해서 언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23세의 어린 나이로 확철대오를 하시고 33세의 그 어린 청년의 몸으로 양산 통도사 선원에 조실로 추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한 선지식인데도 일생 동안을 몸이 불편하시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저녁 공양을 드신 뒤에로는 잠깐 쉬었다가 11시 경이 되면은 그때부터서 예불(禮佛)할 때까지 계속 ‘밤 정진’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는 조실 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봉하신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렇게 무섭게 정진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조실 스님 열반하신지 27년의 세월이 지냈고 또 앞으로 세월이 하루하루 가다 보면 오십 년이 되고 백 년이 되고 오백 년이 돌아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무슨 정진하다가 무슨 소견이 나거나, 보인 바가 있거나, 얻어진 바가 있거나 그러한 것은 바로 삿된 소견이요 잘못된 일시적인 경계일뿐,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바로 법요식이 거행이 되고 분향이 끝나고 나면 점심 공양이 간략히 마련이 되어 있으니 조금 바쁘시더라도 전부 다 점심 공양을 드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숙세의 깊은 인연이 있어서 법보 가족(法寶家族)이 되었습니다. 법보 가족은 정법을 믿고 오직 정법에 의지해서 살고, 정법을 실천하고 정법에 의해서 바른 수행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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