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22.12.18 종과 상전(디모데전서 6:1-2)
Автор: Word
Загружено: 18 дек. 2022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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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상전
2022년 12월 18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6:1-2
(6: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모든 인간은 상전이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상전은 힘의 서열로 매겨지는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고 강한 자라는 인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서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흠모의 대상이 상전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현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한 노예에 있더라도 언젠가는 자신도 힘을 가진 상전을 염원합니다.
잠재적 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나 할 것없이 상전이 되려는 동일한 방향성을 두고 치열한 경쟁마당이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을 세상을 당연하고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우기지만 실은 최고의 세상은 이런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신 것으로 누리는 질서로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악마가 나서서 인간에게 ‘앎이 곧 힘’이 됨을 인식시키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지식에서 나오는 힘의 질서만이 통하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힘을 가진 자는 상전이 되고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자는 종(노예)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에 노예제도가 없다고 하지만 돈없으면 곧 노예 취급받게 됩니다.
상전이 우대를 받고, 종은 하대를 받는 세상에서 자라온 모든 인간들은 그들을 둘러싼 정신 세계가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를 떠안고 있으면서 그 자리에게 구원과 천국을 고대하게 됩니다. 힘으로 누르는 이 현실 세계를 적응하면서 그들은 언젠가는 자신도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을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 끼어들면서 새로운 구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인간의 범죄하기 이전의 구조를 지니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것은 기존의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뒤집기를 시도하면서 생겨나는 세계가 원래의 세계입니다. 처음부터 인간 세계는 상전과 종으로 구성된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주려는 분이 상전이고 얻어받는 쪽이 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시지만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실제로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었던 그들은 자기 사람으로 보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곧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뼈 속에 말씀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 상전이고 싶어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가 기피하는 종이 되신 겁니다. 도와주지 아니하면 못사는 분이 되신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기존의 ‘상전 중심의 질서’를 처음 질서로 파괴하시기 위함입니다. ‘종 중심의 질서’로 바꾸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전의 자리도 공석이러야 하고 종의 자리도 공석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 땅에 ‘상전이면서 종으로’ 오신 것은 상전과 종의 자리를 자신으로부터 새로이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0:24-25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들은 그 누구도 상전되고 싶어 환장한 상태에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기존에 있는 힘의 체계를 사용하여 기존 죄인들은 주님의 사람으로 전환시키십니다. 그 방식은 바로 그들의 세계를 힘의 구조로서 눌려서 비틀어버리는 겁니다.
즉 사회의 계층과 국가와 법과 지식은 인간들로 하여금 주눅들게 만들어버립니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이 상전이 되겠다는 의지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 지식과 법이 내리누리는 힘에 인간은 불안과 초조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무조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식으로 대처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자아가 깨어지면서 여기서 새로움이 나오는데 그 새로움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찾는 행위입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사랑하므로서 자신을 잊게 됩니다. 종이나 상전이나 모두 같은 주님을 믿는다면 이들의 할 일은 서로가 그 직장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일입니다.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찾는 그 방식에 눈을 뜨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 기존의 힘의 질서가 다른 질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는 방식’입니다.(마 20:16) 이 세상은 힘의 세계이기에 인간들은 그 힘을 헤아리고 세는 식으로 사고가 뭉쳐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천국은 바로 자신의 노동 값을 헤아리는 자에게 천국은 거꾸로 작용함을 말씀하십니다. 두 개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릴 때, 예수님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은데 그 때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9) 예수님에게 아버지가 둘 있듯이 오늘날 우리들 자신도 둘입니다. 기존 파괴될 인간 질서에서 우리는 힘을 원하는 ‘나’가 있는 반면에, 처음 질서 속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 ‘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상전으로 혹은 종으로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이는 상전 파트에서 일하고 어떤 이는 말단 종으로 일합니다. 어디에서 일하든지 간에 성도끼리는 오직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질서애 속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에서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실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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