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군] 위천교회, 100년 교회 순례(189)
Автор: 100년 교회 순례자
Загружено: 2 апр. 2024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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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창말2길 2]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908년이었습니다. 고제면 개명리에 살던 권서인 권응서가 상천리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같은 해 고제면 무란실에서 온 나이 많은 여성 신자는 찬송과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영접한 상천리의 유응춘과 유계수, 성학 어머니 등이 1909년 1월에 함양군 안의면에서 온 유기도와 여러 명의 학생과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위천교회의 시작입니다. 위천교회는 유응춘(劉應春)과 유계수(劉桂壽)를 중심으로 상천리에 3칸 예배처소를 마련하였습니다.
1910년에는 전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의 동생이 전주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출하여 위천교회로 피신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인 그는 교회에서 교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다가 일본 군인이 추격해 오자 도망쳤습니다. 화가난 일본 군인들은 교인들을 위협하고 구타하였습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교회 설립에 앞장섰던 유응춘이 급히 진주에 있는 나대벽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일본 군인은 선교사에게 보석금을 받고 교인들을 석방하였습니다.
1915년에 지재미로 예배당을 이전한 위천교회는 1920년부터 보통학교 선생인 노한상과 고운서 전도사(1920-1923년)가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이 40여 명에 이르자 1920년에 장기리로 예배당을 이전하였습니다. 교인들은 선교사의 세력만 믿고 도로 정비 부역을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23년에 고운서 전도사가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거창교회의 오형선 장로와 함께 거창지역과 합천 일대의 책임자로 활동한 것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자 입교한지 오래지 않은 교인들은 낙심하여 교회를 떠났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교인들도 서간도로 떠났습니다. 이로 인해 성학 어머니는 홀로 교회를 지켰고, 유응춘은 거창에서 내왕하면서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위천교회는 시골의 작은 교회였지만 올바른 신앙을 지켰습니다. 해방 후인 1949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던 백영희 전도사(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은 위천교회 학생들이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거부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경고하고 구타까지 했으나 학생들이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전국의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현재와 같은 가슴에 손을 얹는 경례로 바꾸었습니다.
백영희 목사는 6·25 전쟁이 한창일 때 예배 중에 들어온 북한 인민군을 호령하여 쫓아냈으며, 그들의 위협을 피해 강단 밑 계단에 숨어서 기도했으며, 새벽기도회를 쉬지 않았습니다.
현 예배당은 1978년에 건축한 것이며 2009년에 신축한 100주년 기념교육관에는 지역의 아동과 청소년들을 위한 큰 바위 작은도서관이 마련되어 있고,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평생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1. 위천교회 100년사, 2009년
[음원출처]
1. 크리스찬 BGM
(https/ / @christian-bg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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