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전 유적지 화북곤을동을 찾아서.
Автор: 유태복TV
Загружено: 21 апр. 2025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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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유적지, 화북 곤을동을 돌아보며,
제주시 화북동,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의 아픈 역사터.
읽어버린 ‘곤을동 마을’은 제주시 화북동 4.440번지 일대, 화북1동 서쪽 바닷가 마을이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데 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8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곤을동이 불에 타 폐가동네가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었다.
4일 오후 3~4시경 국방경비대 제 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마을 22가구와 가운데 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다음 날인 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밑’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가동네가 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에는 지금도 집터,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을 길) 등이 옛 못습을 간직한 채 제주의 4.3사건의 아픔을 응변해 주고 있다.이 마을이 군경에 의해 피해를 본 것에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제주도당 총사령관인 김달삼(대정 출신, 본명 이승진)과 부책임자인 이덕구(1920년 조천 신촌 출신) 잔당들을 잡기 위함이다.
빈대한 두 마리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비롯해 마을전부를 불테워버린 것이다.
김달삼은 권한을 이덕구에게 넘겨주고 월북했다, 이덕구는 1949년 6월 7일 산에서 사살하여 관덕정 마당에서 십자가형틀에 보름동안 전시했던 사진이 지금도 인터넷에서 볼 수가 있다.
이덕구가 사살되고 1957년 4월 2일 마지막 공비 오원권을 체포하여 무기(총, 실탄)를 압수면서 4.3은 종식됐다고 어른들은 말했다.남노당 그들은 남한만의 정부수립을 반대하려고 민주항쟁을 빙자하여 선량한 주민들을 남노당원으로 포섭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말 안 들으면 무자비하게 죽창 등으로 선량한 농부인 필자의 할아버지와 두 숙부님, 고모님 처럼 죽이곤 했다.
필자의 아버지는 살아 보려고 이덕구 통솔하는 남로당 대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한라산 중턱에서 밥 해주는 취사병 일을 하다가 이것이 아니다 싶어 도망 나왔다고 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남로당 즉 공산당놈들이 거짓 선동하는 것을 알아 체리고 부식을 구하러 간다고 해서 틈을 타 몰래 도망처 나왔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고향인 속칭 알무드네에 있는 부인과 5남매를 데리고 화북 불타는 곤을동 옆 동네로 피난와서 숨어 살면서 한 달 사이에 처와 어린 아들 셋, 병원도 못 가보고 애기묘까지 4기를 만들어 묻어야만 했다.
살아남은 장남, 장녀만 데리고 지금의 동초 앞 동네 두문이머들로 와서 살면서 새 여인을 만나 동거 중에 필자를 낳았다고 했다.
필자는 좌익이 아들과 손자로 자라야만 했고, 성인이 돼서도 4.3연좌제에 연류되어 직장생활 함에 있어서 평생 고통을 받으며 살았던 말 못한 아픔을 이제야 토해본다.
제주4.3은 북한 남로당 사상과 남한 민주주의 사상의 이해 못하는 대립과 갈등으로 서로 죽이고 죽음으로 인하여 죽은 자와 산자 모두 슬픔과 아픈 고통이 지금도 제주 땅에 흐르고 있다.
#제주사랑마씸 1조, #유태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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