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떻게 타락했나요? [한글자막]
Автор: Galilee House
Загружено: 15 сент. 2019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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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요 - 인간은 어떻게 타락했나요?
현승건
갈릴리하우스 채플 목사, 선교사, Th.D.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일본 복음화를 위한 문화전도 방식의 전도설교 연구"로 신학박사(실천신학) 학위 취득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 파송선교사
하나님은 사탄을 찾아내 영벌의 선고를 내리시기 위해, 첫 사람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견하신 대로 사탄은 자신의 탐심을 이루기 위해 동산 중앙의 나무그늘 속으로 숨어들었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첫 사람을 속여 하나님의 명령을 배반하게 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첫 사람을 미혹하여 자신의 소유물로 탈취하였지만, 이로 인해 자신의 반역의 증거가 드러나 심판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마치 완전범죄를 위장하고 뻔뻔한 모습으로 생활하던 살인범이, 살인의 증거가 드러나면서 갑자기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처럼, 사탄은 그 반역의 증거가 드러나면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사탄을 찾아내 영벌의 선고를 내리려던 하나님의 첫번째 목표는 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첫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일까요?
과연 첫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만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선악을 분별하게 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다음이 아닌가요?
하나님이 조성하신 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을 위한 생명양식으로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심겨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첫 사람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의 반역의 증거를 드러내기 위해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사탄을 위한 심판의 나무요 그 열매는 사망의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첫 사람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해주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신뢰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첫 사람은, 마치 기저귀를 차고 대소변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기와 같이, 지극한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천사의 배반으로 극심한 전쟁의 혼돈을 경험하신 하나님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새로운 피조물에, 큰 기대와 신뢰를 가지셨음이 분명합니다.
마치 60을 넘어 처음으로 손자를 안아본 할아버지가, 아기의 작고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깊은 사랑과 신뢰를 느끼듯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인 첫 사람에게 큰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첫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신뢰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담겨있었고,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신뢰가, 곧 모든 인류의 구원의 근거가 되었음이 확실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나게 하시고, 첫 사람에게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아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나게 하지 않으셨으면 될 것 아닌가요?’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농부가 쥐약을 놓을 때 개를 묶어 두는 것과 같습니다.
쥐약을 놓지 않으면 개를 묶어 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쥐약을 놓지 않으면 쥐를 잡을 수가 없기에, 지혜로운 농부는 창고 안에 쥐약을 놓으면서, 소중한 개를 부엌 앞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악한 쥐가 와서 개의 목줄을 갉아먹었고, 개는 달려가 쥐약을 먹어버렸습니다.
결국 악한 쥐는 악한 정체를 드러내어 심판의 선고를 받았고, 쥐약을 먹은 개는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개는 쥐약을 먹고 미쳐버렸고, 그것을 인본주의자들은 ‘이성의 동물’이라고 자랑합니다.
농부는, 죽어가는 개를 살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였습니다.
농부는 수의사가 오기까지, 열 줄로 꼰 줄로 죽어가는 개의 목에 목줄을 하고, 든든한 기둥에 다시 묶어 두었습니다.
농부가 열 줄로 꼰 목줄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요, 목줄을 묶어 둔 든든한 기둥은, 이 땅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신뢰에도 불구하고, 첫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사탄의 유혹을 따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탄의 종이 되었으며, 그 결과 임신의 고통과 노동의 수고 그리고 사망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만약에 첫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계획하신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사람은 하나님의 신뢰를 배반하고 사탄의 종이 되어 고통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그 육체의 마지막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사망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반역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진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한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분열되고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하는 자유의지가 선을 행하기보다는, 오히려 악으로 치닫게 될 위험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14세기에 유럽에서 시작된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부흥)는 인문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거대한 인본주의의 패러다임을 형성하였습니다.
16세기에 촉발된 종교개혁 운동조차도, 이 거대한 인본주의의 패러다임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타락한 로마 가톨릭에 반발하여 발생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개혁교회의 설립 근거가 타락한 로마 가톨릭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구실에 불과합니다.
개혁교회가 타락한 로마 가톨릭을 그 설립의 근거로 하여 세워졌다면, 오늘날에도 개혁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로마 가톨릭이 현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타락한 로마 가톨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과오를 시정하고 개선하여, 지금은 개혁교회보다도 오히려 더 나은 사회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 타락한 로마 가톨릭을 설립의 근거로 삼고 출발한 개혁교회는, 이제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여 사라지거나 개선된 로마 가톨릭에 흡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개혁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개혁교회가 타락한 로마 가톨릭을 그 설립의 근거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개혁교회의 설립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다름 아닌 르네상스에서 비롯된 이성적 인본주의입니다.
이성적 인본주의에서는 인간이성의 중시로 인해 진화론이 등장하고, 성경비평이라는 명목으로 성경에 대해 의심을 품고 성경본문에 대해 난도질을 하며, 결국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개혁교회가 이성적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개혁교회의 눈부신 부흥과 성장은 물론이고, 앞으로 개혁교회의 비전이 모두 물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설립된 개혁교회는, ‘가난’과 ‘질병’과 ‘핍박’이라는 방부제적 요소로 인해,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태평양지역에서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한 채, 눈부신 부흥과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개혁교회의 복음을 지켜온 ‘가난’과 ‘질병’과 ‘핍박’의 요소들이 해소되면서, 개혁교회는 서서히 그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개혁교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이에 대한 절망적 탄식속에 체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 이성적 인본주의의 패러다임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20세기 중반에 이성적 인본주의는 종말을 고하였고, 유신론적 감성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정확한 명칭을 부여하지 못하고, 막연하면서도 임시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즈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을 느낍니다.
이미 스러져버린 구시대의 잔재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어차피 지금 세대의 절반 이상은,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태어난 이른바 ‘전설 따라 삼천리’ 세대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신세대 즉, ‘뽀뽀뽀’ 세대로부터, ‘텔레토비’ 세대를 거쳐, ‘뽀로로’ 세대로 이어지는 신세대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정보를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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