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holas and Alexandra(1971) 니콜라이 일가의 최후/ Расстрел царской семьи
Автор: Elon Musket
Загружено: 5 нояб. 2017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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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로 진전되지않다가 1907년 즈음 가서야 겨우 진전되어 갔다. 또한 러시아에는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의 개혁에 힘입어 연평균 7%의 산업 성장화를 보이면서 한때 로마노프 왕조의 위세를 떨치기도 했으나 1911년 9월 14일 스톨리핀 총리마저 암살되면서 개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한편 노동자와 농민층이 황제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동원령을 내려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1차세계대전에 지지를 하였고,무려 1500만 명이 전선에 나가 지원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한 것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의 불안은 고조되어가면서 제정 러시아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914년 8월 ~ 1915년 8월까지 러시아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어 140만 명이 전사하고 97만 6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가 발생하고,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최전선 전투 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자연히 되어가면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라스푸틴의 폭정과 착취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규모에 달했다. 예를 들어 민중들 사이에서는 검열되지 않은 책 같은 것이 출판되어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황후, 공주들이 불건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등 내용의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였다.
결국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라스푸틴의 악행에 치를 떤 나머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도 있었는데 이후 1916년 12월, 니콜라이 2세와 친척 측근인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을 비롯한 관리들이 라스푸틴을 죽이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지만 라스푸틴은 극약을 먹고도 2시간 동안 춤을 추는 등 초인적인 체력을 보여주다가 총에 맞고도 죽지 않았다.
그 후 라스푸틴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사망 원인은 독극물도, 총살도 아닌 익사였고 혁명의 기운은 날이 갈수록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황제의 명령이 아닌 케렌스키의 명령을 따르게 된) 군인(러시아가 아닌 케렌스키 개인 소유의 군인)들의 감시를 받아 가면서 우랄 지방에 거처하게 되었다.
약 8개월 동안 단란한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에 깨끗했던 궁전이 아닌, 평범한 민가(民家)에 살아야 했다. 군인들은 그들의 대화까지도 엄격히 검열했다. 이때 황후 알렉산드라만은 아주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된다.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1918년 7월 어느 날, 유대인 출신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적군(赤軍)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었고 바로 그날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전원 불태워져 소각되었고, 소각된 시신들은 1991년에 들어서야 발굴되었다. 이때 적군은 니콜라이 일가족들을 서둘러 처형했는데 니콜라이 황제의 지지세력인 백군(白軍)이 그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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