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스님 법성게 이야기 3 # 법성원융무이상
Автор: 시흥 중정스님 tv
Загружено: 20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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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법[法]과 성[性]이 원융[圓融]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니
‘법성’ 은 원융하여 일정한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무이상(無二相)입니다. 법성이란 ‘법’은 일체존재 이고 ‘성’은 그 성품으로서 원융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성은 존재로서 그 성품이 원융한 것, 또는 그 성품이 원융한 존재입니다.
‘원융’은 사전적 설명으로는 ‘모든 이치가 하나로 융화되어 구별 없고 방해됨이 없이 무애함’입니다.
법성원융이라 함은 법계 모든 존재가 다 동등하여 두 모습이 없다는 것인데 하나뿐이기 때문에 둘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모습뿐이기 때문에 두 모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두 모습이면서 한 모습입니다. 둘·셋·넷 다양하면서도 하나이고 한 모습입니다.
법성게에서 ‘법’이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성품은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어서 ‘존재의 참모습’, 진리가 바로 법성게 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의 성품, 존재의 참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성품은 극히 미묘하여 스스로 의 성품인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법의 참 성품, 본래의 성품은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했는데, 우리가 보는 세계와 존재의 모습은 어떠하냐면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의 행동에는 착하거나 나쁜 것, 빠르거나 느린 것, 선한 행위거나 악한 행위, 바르거나, 그른 생각 아름답거나 추한 것, 크거나 작은 것,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존재의 참 모습은 두 모양이 없다 하니, 우리가 아는 것 과는 정반대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를 기준으로 법성을 말해보면,
우리는 제법이 무아(無我)이고 무아소(無我所)임을 알고 있습니다. ‘법성게’에서는 더 나아가 제법은 원융이라고 합니다. 공하기 때문에 공이라서 원융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부연한다면 나의 몸과 마음은 ‘법’이고, 나의 몸과 마음이 원융한 것이 ‘성’입니다. 그 법성 역시 원융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원융한 것인가? 무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법성원융 은 두 모습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존재는 동등하여 둘이 아닌데 다만 사람들이 허망하게 분별하여 나와 남을 나누어 차별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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