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25.04.20 존재와 경로(히브리서 11:1-3)
Автор: Word
Загружено: 20 апр. 2025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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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경로
2025년 4월 2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3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 ‘실상’, ‘보이지 않는 것’, ‘말씀’‘나타난 것’, ‘보이는 것’이런 단어들이 모여있습니다. 이런 말들의 조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은 현실 구성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의 일부로서 나타난 것에 의해 보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보인다’는 것은 ‘보는 인물’이 나타난 세상 안에서 발생한다는 겁니다.
세상을 눈으로 보고 있는 나는 어디서 온 것인지요? 이점에 대해서 나타난 것들을 통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나타난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고 있는 육신으로는 알 길이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있는 ‘나’가 없어지면 그동안 알던 세상도 그와 더불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으로 인해 알 수 있다면 보고 있는 자가 자기 수명을 다한다면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은 자신과 함께 소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바냐 2: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습 2:15)
인간의 가장 깊숙한 마음에 자리잡은 상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즉 세상에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도 각자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는 없다’에 철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을 일어나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인간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에 감히 끼어들 수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자신의 일이요 자신의 스토리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나는 세상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이는 창세기 3:19에 위반대는 사태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미 인간들은 흙으로 돌아가기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흙이라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그 외에 인간이 할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허상인 인간이 아무리 세상의 허무를 말해도 그것으로 자신이 실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상인 존재가 실상에 가담되는 것은 ‘말씀’의 자체적인 작용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기대의 의도를 무산시킵니다. 그래야지만 인간은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잘남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만 있고 나 외는 없다’가 말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당한다는 말은 말씀에 의해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나의 의’가 공격받아 부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는 ‘나는 잘났다,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가 내세워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허상에서 벌리고 있는 ‘잘난 나 증인’에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걸까요? 오늘 본문 11:2에 보면, ‘말씀’이 친히 그렇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모든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망치게 하시는 식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10-12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방해물이 되고 방해꾼이 됩니다. 소위 하나님 말씀을 믿겠다고 나서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믿음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자신을 죽이고 그 죽은 힘을 도로 나에게 적용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실상대로 작용하려면 ‘보이지 않는 세계’의 활동이 우리 자신을 쳐야 합니다.
말씀과 약속이 우리는 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사기 11:36에 입다의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애꿎은 무남독녀 딸, 그것도 시집도 못가본 딸이 아버지의 객기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진지하게 딸에게 부탁합니다. 괜한 말에 신경쓰지 말고 그 없던 일로 돌리자는 겁니다. 그러나 입다는 딸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조차 하나님의 일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 허상 죽음의 경로를 감히 인간들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에스더 4:16에 보면, 에스더 왕비가 나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닥쳐온 사태를 주님에 의한 말씀 활동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습니다. 허상에서 실상에 이르는 길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공로가 끼어드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결과적으로 ‘열매 맺은 밭’과 ‘열매 없는 밭’으로 구분됩니다. 열매없는 밭에는 경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 맺은 밭’에는 경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아무리 애써도 사단의 방해와 환란과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열매 맺을 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써 드러나는 허상과 자기 잘남의 시도와 결정은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2:7-8의 말씀을 통해서 철저하게 인간의 모든 경로를 간섭하셔서 실상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오직 주님 자신의 일만 홀로 하심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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