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병시절 5 - 또 다른 이별 이야기 2 (2사단, 노도부대, 32연대, 스키대대, 양구, 구암리, 군대이야기, 군복무담, 의병제대, 의가사제대, 백치제대)
Автор: 예비역병장(동그레)
Загружено: 21 мар. 2025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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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병시절 5
또 다른 이별 이야기 2
우리 소대에서 건강상 이유로 의병제대한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와 같은 총1분대 제2총 탄약수로 있던 이아무개 일병으로 나보다 1개월 정도 후임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에 있을 때 건축 현장에서 일을 했다는데 1981년 12월 우리가 11사단 대항군훈련 할 때 도로장애물을 만들 커다란 돌을 등짐으로 져서 나르며 다 노하우가 있다고 큰소리 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평소에 근면 성실하고 훈련에서도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임하는 전우였습니다.
나와 같은 분대원이었고 입대도 별 차이가 없는 같은 졸병신세였기 때문에 많은 힘이 되었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던 그가 간질병 증세가 있어서 후송 되었다가 나중에 의병제대를 한 것입니다.
1982년 2월 격오지 파견 나가기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새벽 두세 시경에 내가 불침번을 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40분쯤에 외곽초소 근무자를 먼저 깨워 근무준비를 시킵니다.
동절기에 외곽초소 근무자는 복장을 갖추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중대본부에 들러 신고하고 실탄 지급받고 초소까지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날 후번 외곽초소 근무자는 바로 그 이일병과 또 다른 사람 등 두 명이었고 나는 먼저 그를 깨웠습니다.
그가 즉시 일어나 옷을 입는 것을 보면서 그와 함께 나갈 근무자를 총2분대에서 깨우는데 갑자기 뒤에서 ‘쿵’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바라보니 조금 전까지 일어서서 옷을 입고 있던 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달려가 보니 그는 내무반 통로에 쓰러져 있었는데, 입에서는 거품을 물고 팔다리는 뻣뻣하게 경직된 상태였습니다.
놀란 나는 뒤따라 일어난 다른 근무자와 함께 경직된 그에게 달려가 그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주며 그의 볼을 때리고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일이분 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 앉더니 빙그레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놀라움이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소대원들도 놀라서 일어났고 우리는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횡설수설 변명하듯 말하는데 그 요지는 이랬습니다.
자기가 군에 오기 전에 공사장에서 소위 노가다일을 했는데 하루는 술을 많이 마시고 바깥 한데서 잠을 잔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팔이 저리고 마비되더니 가끔 그런 일이 있다며,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진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근무준비를 한 다음 외곽초소 근무를 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예사롭지 않아 보였고 다음날 선임하사에게 보고하고 선임하사는 다시 중대에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즉시 의무대로 불려갔고, 이날 이후로 그는 거의 소대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내가 연대 의무대로 문병을 갔는데 그는 괜찮다면서 곧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병을 이유로 군 생활을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만큼 군 생활에도 잘 적응하고 있었고, 또 힘겨운 졸병생활을 거의 다 보내고 두달 뒤면 상병 진급을 앞두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82년 3월 8일에 그는 춘천 군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결국은 간질병 판정을 받고 의병제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격을 해야 할 군인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 엄청난 사고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군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평소에 그는 나를 잘 따랐고 나도 나름 잘해주었기 때문에 군병원으로 후송 간 뒤에도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와서 자주 편지를 나누며 교류를 했습니다.
또한 자기와 함께 병원 생활하는 환우까지 소개해서 그와도 함께 편지를 나누곤 했는데 그가 전역한 뒤로는 소식이 끊어졌고 지금까지도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기왕 이야기 나온 김에 훗날에 의가사제대한 한 사람을 더 소개할까 합니다.
양아무개 일병은 1982년 7월 군번으로 나보다 훨씬 후임이었는데 1983년 3월에 나보다 앞서 의가사제대를 했습니다.
양일병은 덩치는 컸지만 정말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심도 깊어서 나와 늘 함께 교회에 나가면서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그는 목공일을 하다가 입대를 했는데 목공일을 배운 것에 대해 자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무를 가지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자라온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내게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신앙간증문 같은 것이었는데 그 글에서 자신의 가정사를 자세히 적었더군요.
그의 아버지는 6.25때 북한군으로 참전하였다가 포로로 잡혀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석방된 반공포로였습니다.
비록 강제로 징병되어 공산군으로 참전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공산주의 사상을 싫어했기 때문에 반공포로로 분류되었고 1953년 이승만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할 때 자유의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반공포로 석방으로 풀려난 그의 아버지는 그 뒤로 춘천에 정착하여 가정을 꾸리고 바로 양일병 등 자녀를 둔 것 입니다.
그런데 고생을 많이 하셔서인지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건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건강이 무척 좋지 않으셨는데 결국 양일병이 입대하기 전에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께서도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든 일을 할 수 없어서 가족들을 부양할 형편이 못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가친척도 없이 타향에서 홀로 떨어져 살고 있는 그의 아버지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큰아들인 그가 입대를 한 것이었고, 그는 그것을 늘 가장 걱정을 했습니다.
아직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이 있는데 그들을 부양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큰아들이 없으면 가정 경제를 유지할 수 없다며 양일병의 의가사제대를 신청했고, 그 청구가 받아들여져서 그는 입대한지 9개월 만에 일병을 달고 전역을 한 것입니다.
1983년 3월 4일, 양일병이 전역하던 날.
내가 써준 환송사를 들고 기뻐하며 부대를 떠나던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지금쯤이면 그도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양일병.
어디선가 솜씨 좋은 목수로 최선을 다한 삶을 살고 있겠지요.
커다란 덩치에 순박하기만 했던 양일병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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