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정은혜 작업실, 조각 부조 사진등 다채로운 작업들의 현장

CHAPTER-1 백호- 경계의 숨 정은혜

나는 사라져가는 존재들, 시선의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에 끌린다. 어린 시절 권력과 침묵의 관계 속에서 말하지 못하는 존재의 감정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그때의 감각이 지금의 윤리적 응시로 이어졌다.

삶의 특정한 장면들-성당의 애덕의 집 방문에서 보았던 장애인의 표정, 아기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느꼈던 불편함, 곤충박물관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던 피딩체험의 잔혹한 장면-그 모든 경험은 존재의 위계를 떠올리게 했다. 그 속에서 나는 타자의 입장을 상상하고, 그들의 감정을 되살리려 한다. 그것은 연민이라기보다 공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행위에 가깝다.

예술은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를 보게 만드는 힘이라 믿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드러내고, 익숙한 질서를 뒤집어 타자의 시선을 호출하는 일, 나는 그 힘이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존재의 윤리를 복원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업은 시선의 전환을 요구한다.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인간이 아닌 타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원론적 사고가 만든 위계와 분리를 해체하고, 인간과 동물, 생명과 비생명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조형을 만든다.

사신도는 단순히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세계의 질서와 생명의 리듬을 그린 우주의 지도였다. 쳥룡, 백호, 주작, 현무는 각각 동서남북의 방향과 계절, 오행의 기운을 품으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죽음 속에서 재생을 상징했다. 고구려의 장인들은 사신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순환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나는 그 오래된 상징이 단지 죽은 자를 위한 수호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살아있는 질서’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를 재해석하면서, 신성한 수호신이 아닌 위계 없는 생명의 상징으로 다시 읽어낸다.

사신도의 동물들은 여러 생명체의 일부를 결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그 다양한 형태들은 절단과 결합, 긴장과 이완의 리듬 속에서 하나의 유기체로 거듭나며, 신명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러한 율려의 작용은 이분법적인 질서와 경직된 사고를 무력화시키며,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된 생명의 흐름 속에 놓여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를 둘러싼 한국, 중국, 일본 간의 문화적 논쟁은 내게 이 이미지를 다시 다루고 싶게 만든 또 다른 계기였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 속에서 ‘누구의 유산인가’를 다투는 시선은, 결국 존재의 중심성과 소유의 감각을 드러낸다. 나는 그 시선을 벗어나, 사신도의 이미지를 오늘의 감각 속에서 다시 살려내고자 했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선 공존의 감각으로의 전환이다.

네 존재는 질서 없는 조화, 위계 없는 다종의 공존을 상징한다. 일상에서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되는 존재들을 상징적 존재로 재구성하거나, 인간과 동물의 혼성체를 구현한다.

이번 전시는 사신도 연작 중 ‘순환의 전조(前兆)’로서의 ‘백호’에 집중한다. 그 이후로 이어질 ‘현무’의 세계로 향하는 첫 장(章)이다. 원래 서쪽을 수호하던 신수였던 백호는 나의 작업 안에서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 선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 중심의 질서 속에서 주변화된 동물, 육식문화와 연결된 비가시적 생명들을 소환하며, 소멸 이후에도 계속되는 생명의 숨을 탐구한다.

도자, 스테인레스봉, 레진, 테라시질레타 등 서로 다른 재료를 병치하고 교차시킨다. 각기 다른 밀도와 질감이 충돌하며 균열과 결합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조형 과정은 단절된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숨’의 형식을 찾는 시도다.

분리된 존재들이 하나의 순환 속으로 귀환한다. 이렇게 해체된 형상을 다시 하나의 형상으로 가져옴으로써 인간 중심적 가치관을 넘어 만물의 평등성과 상호의존적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숨을 이어주는 리듬 그 자체이며, 생명은 생명을 순환시켜주는 윤리적 관계인 것이다.

나는 그 숨이 단지 목숨의 호흡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내어주고 함께 머물던 자리의 기억이라 생각한다. 그 잊힌 숨을 다시 느끼는 순간, 새로운 생명의 리듬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처럼 이어진다.


#정은혜 #갤러리세인 초대전 202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