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맛 : 왜 어떻게 '법성', '공성', '각성'인가?
Автор: 마하보디선원 TV
Загружено: 25 июл. 2022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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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맛은 분명합니다.
법에다 ‘맛’을 붙여 얘기하는 까닭은
그것이’ 고’의 치유책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법의 연기가 들어있습니다.
깜마(업)의 연기와 법의 연기를
비교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카(고)의 치유책으로는
법의 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는 그저 원인 결과입니다.
법의 연기, 법의 원인 결과는
수행에서는 사띠와 지혜입니다.
사띠와 지혜는 젓가락 두 개로 일합니다.
법의 연기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으로 말하면 ‘무위행’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대인 업의 연기, 업의 원인 결과는 뭘까요?
조건 지워져서 자꾸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띠와 지혜가 없을 때, 아사띠일 때는
생겨나기만 합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너무 지루하고, 너무 모집니다. 왜 그럴까요?
반대되는 것, 사라지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법의 연기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줄 모릅니다.
통찰 수행의 백미입니다.
‘법의 맛’이 그것입니다.
‘법성’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법성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띠 한 번에 법성이 항상 생겨납니다.
그런데도 모릅니다.
사띠의 힘이 약해서 입니다.
아낫따 두카 아닛짜의 3법인을
법성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3법인이 법성입니다.
빠라맛따의 성품입니다.
아닛짜를 알면 반드시 빠라맛따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을 책 내용을 외우듯 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닛짜와 빠라맛따의 관계를 알지 못합니다.
성품이 같다고 할 수도 있고, 매우 유사하고,
같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상으로 아는 것이 바로 법의 연기입니다.
그것이 법성을 일어나게 합니다.
떼자니아 사야도는 말합니다.
“수행할 줄 아는 사람들은 대상으로 인하여
사띠 삼마디 지혜가 나서이익을 얻는다.
수행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대상으로 인하여 번뇌를 일으켜 손해를 본다”고.
업의 연기는 사띠와 지혜가 없는 모하입니다.
모하라고 하면, 이미 탐진치가 함께 일합니다.
알아차림은 그만큼 소중합니다.
‘대상으로 인하여’는 바로
법의 연기 관계가 됩니다.
업의 연기를 끊어낼 수 있는 길,
마음의 그런 작용이 됩니다.
집착하지 않으니 자유롭습니다.
마음이 법성일 때, 지혜로 볼 때
실재를 볼 수 있습니다.
지혜의 성품을 법성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빠라맛따를 대상으로 합니다.
마음이 법으로 바뀌면 스스로 알아서 일합니다.
아주 작은 번뇌라도 마음이 알아서 해결합니다.
그것이 법의 맛입니다.
해결하는 능력이 맛입니다.
그래서 ‘고의 치유책’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두카는 대상입니다.
내 두카가 아닙니다.
대상이 됐기 때문에 지혜가 하는 말입니다.
법이 하는 말입니다. 두카는 법이 됐습니다.
일어나는 걸 다 두카로 보면 그것은 법성입니다.
그래서 ‘고의 치유책’이 되는 것입니다.
대상이 되버리면 빠라맛따입니다.
지혜가 나면 너무 간단한 일입니다.
고는 더이상 괴로움이 아닙니다.
담마(법)입니다.
대상이 지혜에게 당하면 지혜가 됩니다.
“지혜는 지혜를 대상으로 한다”가 그 말입니다.
공간성으로 보면
그 간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틈새, 거리, 시간차, 시공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법뇌로써 업을 짓는 것도 순간입니다.
공덕을 쌓는 것도 찰라지간입니다.
‘내생’ 같은 말은 필요 없는 말이 됩니다.
법 쪽으로는 공경스럽지만
업 쪽으로는 무섭습니다.
사람의 몸을 받으면
공덕을 짓고 쌓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불선입니다.
무섭고 넌더리 나는 일입니다.
사띠와 지혜로 살아간다면, 어쩌면 사띠 한 번
두는 일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 구 의 3행을 업의 행으로 놓아 먹이고, 또
그것이 너무 오래되어 사띠 두기가 어렵습니다.
오래된 무의식이고 습관적인 행위 만이라도
단속하고, 바른 쪽으로 이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업의 연기는 강합니다.
오랜 기간 방치해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그것들을 설게하고, 사띠와 지혜로써
법성으로 익게 하는 일입니다.
힘이 좋아지고 지혜가 나면
본인의 마음이 어떻게 일한다는 걸 다 압니다.
지혜가 일할 때는 아주 미세한 것도 다
알아차려지기 때문에 금방금방 압니다.
두카를 법성으로 볼 수 있는 힘은 지혜입니다.
그때 두카는 빠라맛따, 법성이 됩니다.
그런 지혜가 나야 두카의 진리, 고제와
고집제를 알게 됩니다.
고집제를 아는 지혜는
멸성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일어남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성제는 책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띠와 지혜 안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담마(법)은 책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 안에, 사띠와 지혜 안에 있습니다.
보는 힘이 약하면 볼 수 없습니다.
사띠의 힘을 길러서 봐야 합니다.
낄레사(번뇌)도 법입니다.
그것도 일어나는 것으로 봐서, 이해해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혜가 나면 견해와 생각이 바르게 되고
정견이 길러져서 견해가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빠라맛따를 보는 힘이 좋아져서
번뇌도 법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 지혜는 업도
‘자연의 이치’로 볼 수 있습니다.
견해와 생각을 바꾸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사띠와 지혜가 바꾸는 것입니다.
지혜가 보는 것이 바꾸는 것이고, 그렇게
정견, 정사유, 정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팔정도가 완성된다고 하고
팔정도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중도로 가는 길입니다.
중도를 알게 되면 상당한 힘이 생깁니다.
중도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있습니다.
책에 있는 그런 중도가 아닙니다.
중도를 알게 되면
‘고’의 끝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수행을 하면 위빠사나 지혜와
도과지혜가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두카를 보는 자 두카의 끝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상으로 알아야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 아는 것은 법의 연기인데, 구속하는 조건을
풀어해치는 것, 자꾸 생겨나서 힘들게 하는 것을
사라짐의 지혜, 벗어남의 지혜가 나서
해결할 수 있는 지혜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법성’의 다른 말로 ‘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공성을 기술로써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담마(법)은 사띠와 지혜가 있으면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절로 드러나 보입니다.
현시가 됩니다. 현법이 됩니다.
현현합니다.
발현하고 알현이 됩니다.
그래서 밝혀진다, 깨어난다고 하고
알려진다고도 합니다.
‘앎을 당하는’ 것이 그런 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하는’ 것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공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술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모하(무명)로써 어떻게 공성을
만들어 내겠습니까?
탐 진 치, 모하는 가짜를 진짜로 만듭니다.
또 진짜도 가짜로 만들어 냅니다.
‘공성’이라고 해서 ‘텅 비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반드시 원인 결과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한마디로 연기입니다.
원인 결과를 불교하고 합니다.
공성도 어떻게 왜 어떻게 하니 어떻게 되더라,
‘되더라’가 공성이라면
‘되더라’ 이전의 ‘어떻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밝히고 본인이 체험, 경험해야 합니다.
공성이 기술로 만드는 게 절대 아니잖아요.
사띠와 지혜의 결과로써 드러나기 때문에
어떻게 왜를 아는 것입니다.
사띠와 지혜가 있으면 법은 항상 곁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법성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쪽을 알아야 완전하다고 할 수 있지,
한쪽만 알아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왜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왜를 모르면 법문을 할 수 없습니다.
법의 자연적인 성품에 따라서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에 법성입니다.
저절로 깨달아지기 때문에 각성입니다.
번뇌가 없고 법만 가득차서 공성입니다.
우뻬까 빠라맛따를 말할 수도 있겠지요.
갑자기 우연히 그런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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