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덕이슈 오늘 I 57 제주4.3사건, 잠들지 않는 남도
Автор: KBS역사저널 그날
Загружено: 25 янв. 2019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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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맞아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던 제주도민들에게 고통은 광복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극심한 경제난과 콜레라 같은 전염병의 창궐, 거기에 미군정 아래에서 경찰로 변신한 친일경찰들의 횡포 또한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1947년 3월 1일,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3.1절 기념행진 도중 기마경찰이 말발굽에 치인 아이를 외면하자 군중들이 분노했고, 그들을 향해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날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고, 도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3.10 총파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미군정은 제주도를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규정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 고문까지 일삼으며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 서북청년단은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폭행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이렇게 흉흉해진 민심을 틈타 남로당 제주도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킵니다. 무장대는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습격했습니다. 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앞둔 시점, 미군정은 무장대에 대한 강경진압을 결정합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로 구성된 군경토벌대의 무장대 토벌이 시작됐고, 5.10 선거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4.3사건을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합니다. 그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대의 발본색원을 명합니다.
그러나 정작 무장대와 군경토벌대 사이에서 희생된 것은 무고한 제주도민이었습니다. 토벌대는 어린아이, 노인, 임산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살했습니다. 1948년 10월부터 시작된 9연대의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마을의 95%가 소멸됐고 2만 5천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됐습니다. 토벌대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과 방화를 일삼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즉결처분하거나, 도피자를 대신해 가족들을 사살했습니다. 자수한 사람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함정 토벌, 보복 토벌도 자행됐습니다. 인간사냥을 방불케 하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 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입은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무장대 총책의 사망으로 마무리되는가 싶었던 제주의 상황은 한국전쟁 발발로 다시 끔찍한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대대적인 예비검속과, 수감돼 있던 4.3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즉결처분으로 다시 3천여 명이 희생된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제주4.3사건. 하지만 당시 왜 그런 비극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진상조사조차 미흡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이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행불 상태입니다. 2018년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제주4.3사건, 이제는 제주의 겨울에 사과와 위로의 봄바람이 불어오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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