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신학의 아버지, ‘슐라이어마허 목사’ (CTS, CTS뉴스, 기독교방송, 기독뉴스, 기독교뉴스, 교계뉴스)
Автор: CTS뉴스
Загружено: 2 нояб. 2018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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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독일의 개신교회는 수많은 신학자와 목사를 배출했습니다. 19세기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목사는 그중 한사람인데요,
베를린대학교 신학대학의 교수이자 목사였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베를린에서 김영환 통신원입니다.
베를린 크로이츠 베르크 지역에 위치한 공원묘지. 이곳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목사의 묘지가 있습니다. 고요한 공원묘지 한 켠에 자리 잡은 묘지에서 그의 치열했던 삶의 체취가 느껴집니다.
슐라이어마허 목사는 1768년, 개혁교회 소속의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건주의를 강조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1796년 독일 루터교의 목사가 된 그는 베를린으로 옮겨와 목회를 시작합니다. 또한, 베를린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신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SOT) 크리스티안 슈테블라인 / EKD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교구장
특히, 철학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등 독일의 낭만파 학자와 문학가들과 친밀한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 바로 ‘종교론’입니다.
슐라이어마허 목사는 인간을 ‘주체’로 생각한 최초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모든 삶과 사유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주체로서 인간에게 종교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굴복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점에서 교리를 중요시하는 정통주의 신학과 결별하고, ‘19세기 자유신학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SOT) 크리스티안 슈테블라인 / EKD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교구장
시대의 철학적 사상을 신학의 영역에 수용하면서도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지적을 아끼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목사. 독일의 신학자들은 19세기 근대신학의 정신은 슐라이어마허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를린에서 CTS뉴스 김영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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