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태안사 25.5.27
Автор: 곡산랜드
Загружено: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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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구례 화엄사의 말사(본사에서 갈라져 나온 절)로 신라 경덕왕(742~765)때 신승이 대안사라는 사명으로 창건, 조선시대 이후 태안사로 사용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통일신라의 동리산문 을 세운 적인선사 혜철(785~861)의 부도이다.
*동리산문: 신라 헌덕왕(809~826) 이후 당나라 에서 선법을 받은 유학승들이 귀국하여 형성한 선종의 9개 파인 구산선문 중 태안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파
*혜철: 814년 당에 유학하여 선법을 전해 받고, 동리산 태안사에 머물면서 동리산문을 형성하였고, 입적 후 신라 경문왕으로부터 시호는 적인, 탑호는 조륜청정을 받음.
*부도: 고승이 죽은 뒤에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석조물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국보 승격 2025.3.11)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을 개산한 적인선사 혜철(785~861)의 부도탑으로 신라 경문왕으로부터 시호는 적인, 탑호는 조륜청정을 받았다.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가구식 기단을 별도로 조성하고, 건립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부도탑으로 하대석에는 각기 다른 형상의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고, 탑신석 각 면 좌우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인방 등 목부재를 모각하였으며, 문비와 사천왕상 등을 평면적으로 섬세하게 조각하여, 하나의 조형물에서 역동적인 조각기법과 절제된 조각기법을 동시에 표현하였고, 전체적인 비례감과 조형미가 뛰어나며, 옥개석은 전통한옥의 처마곡선과 목부재를 사실적으 로 재현하여 당대 최고의 석공이 시공했을 것 으로 추정되어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태안사 적인선사탑비비문에 적인선사와 탑의 건립(861년)시기를 명확하게 기록으로 알 수 있어, 석조미술의 편년 기준작임과 함께 가구식 기단 주변에 4개의 주초석이 현존, 신라시대 건립된 승탑 중에서 유일하게 탑전 시설을 갖추고, 개산조(혜철)에 대한 예불행위가 있었다는 신앙적 행위의 구체적 사례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팔각원당형: 부도탑의 기단, 탑신, 옥개석이 팔각형 으로 이루어진 형식
*문비: 부도탑, 석탑의 탑신석에 사리장치를 봉안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새긴 문짝 장식
사천왕상: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형상화한 불교조각
*탑전: 탑을 외부 자연환경으로부터 보호하고 예불을 하기 위한 건축물
#태안사 적인선사탑 국보 승격 2025.03.11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에 있는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2025년 3월 11일 국보로 승격되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후 62년 만이다.
적인선사탑은 통일신라의 동리산문을 세운 적인선사 혜철(785~861)이 입적한 뒤, 그의 행적을 추앙하고 사리를 안치하고자 세운 석조물이다.
#곡성 태안사 일주문(보물)
2017년 보수공사에서 확인된 상량문을 통해 1521년(중종 16년)에 조계문으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량문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1396~1486)의 수결(서명) 흔적이 남아있다.
태안사는 6·25전쟁 당시 거의 소실되었으나 일주문은 능파각과 더불어 남아 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 일주문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뒷면에는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태안사 일주문은 상량문을 통해 조선전기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기 법을 잘 보여주는 공포의 형식과 짜임으로 보아 창건 이후 보수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보물)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태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에서 계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 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 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 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 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 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 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 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보물)
고려시대의 탑으로,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이고 법명은 윤다이다.
탑의 형태는 바닥돌부터 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위에 탑신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받침이 올려져 있다.
윗 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몸돌은 앞뒷 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흔하지 않게 머리장식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며, 각 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롭다.
#태안사 동종(보물)
태안사에 소장된 조선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종이다.
맨 위에는 대롱 형태로 솟은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두 다리로 천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그리고 어깨위를 돌아가며 입화장식과 그 아래로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군데에 사각형의 연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연뢰를 나즈막하게 돌출 표현하였 다.
몸체의 하대는 종구에서 조금 올라와 배치 되었는데, 상대와 마찬가지로 연꽃무늬와 당문을 새겨 넣었다.
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대형의 왕실 발원의 범종에서 사찰 중심의 범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우수한 16세기 사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곡성 태안사 청동 대바라(보물)
바라란 절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거나 춤을 출 때 사용하는 타악기이다.
냄비 뚜껑같이 생긴 두 개의 얇고 둥근 쇠판 으로 만들며, 쇠판 중앙의 볼록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
이 바라는 지름 92cm로 크기가 크며, 제작 방법 이 우수하다.
국내에서 제일 큰 바라로 외곽의 일부가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손상이 거의없이 내려왔다.
이 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명문이 남아있다.
크기로 보아 직접 들고치기보다는 어느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안사 능파각(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 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라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 는 민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구산선문
신라 말과 고려초에 형성된 선종의 9개 파를 말함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성주산문
*사굴산문
*사자산문
*수미산문
#인생 진미령
#인생은 물레방아 진성
#인생 홍지윤
#휘어진 인생 조영남
#인생 모정애
#인생 색소폰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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