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 비댜 제3장 끄리쉬나의 에너지에 관한 지식
Автор: 하레 끄리쉬나 Hare Krishna
Загружено: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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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가바드 기따의 제9장이 특히 스리 끄리쉬나를 최고 인격신으로 받아들인 자들을 위한 것임을 주목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제9장은 당신의 헌애자들을 위한 것이다. 스리 끄리쉬나를 지고의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장은 실제 내용과는 사뭇 다르게 드러날 것이다. 처음에 명시했듯이 제9장의 주제는 바가바드 기따를 통틀어 가장 비밀스러운 주제다. 만일 끄리쉬나를 지고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이 장을 그저 과장이라고밖에 생각지 않을 것이다. 특히 끄리쉬나와 당신의 창조에 관한 구절들이 그렇게 여겨질 것이다.
마야 따땀 이담 사르밤 mayā tatam idaṁ sarvaṁ
자갇 아뱍따-무르띠나 jagad avyakta-mūrtinā
맛-스타니 사르바-부따니 mat-sthāni sarva-bhūtāni
나 짜함 떼쉬 바바스티타하 na cāhaṁ teṣv avasthitaḥ
“나의 나타나지 않는 형상 안에, 나에 의해서 이 전 우주가 존재하느니라. 모든 존재는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그들 안에 없다.” 《바가바드 기따 9.4》
우리가 보는 이 세상 또한 끄리쉬나의 에너지, 당신의 마야(māyā)이다. 여기서 마야란 “나에 의해서”란 뜻으로, 누군가 “이 작품은 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나에 의해서’는 당신이 일한 후 사라지거나 은퇴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일 내가 큰 공장을 하나 시작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공장은 내가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가 사라졌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비록 제조업자가 자기 생산품을 “나에 의해 제조되었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가 그 물건을 직접 창조했거나 조립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제품은 그의 에너지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끄리쉬나께서 “네가 보는 무엇이든 나에 의해 창조되었다.”라고 하신 말씀을 끄리쉬나께서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시므로 창조물 전체에서 절대신을 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회장 포드 씨를 구석구석에서 보는 것처럼, 끄리쉬나의 과학에 정통한 자는 모든 창조의 원자 속에서 끄리쉬나를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끄리쉬나 안에 있지만(맛-스타니 사르바 부따니: mat-sthāni sarva bhūtāni, 바가바드 기따 9.4) 끄리쉬나는 거기에 있지 않다(나 짜함 떼쉬 바바스티따하: na cāhaṁ teṣv avasthitaḥ). 끄리쉬나와 당신의 에너지는 다르지 않지만, 에너지는 끄리쉬나가 아니다. 해와 햇볕이 다르지 않지만, 햇볕이 해는 아니다. 햇볕이 창 사이로 비쳐 방 안으로 들어오지만, 태양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쉬누 뿌라나(Viṣṇu Purāṇa)는 이렇게 말한다. 빠라샤 브라흐마나하 샥띠히(arasya brāhmaṇaḥ śaktiḥ). 빠라샤는 최고를 의미하고, 브라흐마나는 절대 진리를, 샥띠히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지고의 신에서 모든 에너지가 나왔지만 그 에너지 속에서 끄리쉬나를 찾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을 믿음이라 한다. 맹신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끄리쉬나께서 수많은 작은 씨앗 안에 큰 나무를 넣는 일이 가능하다면, 당신의 에너지로 우주에 행성 체계를 떠 있게 유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만한 일인가?
과학자들은 행성이 그저 자연에 의해 우주 안에 놓여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자연의 뒤에는 지고한 주가 존재한다. 자연은 당신의 지시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스리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다.
“이 물질적 본성은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오 꾼띠의 아들이여, 이 법칙으로 모든 현상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9.10》
마야댝쉐나(Mayādhyakṣena)는 ‘내 감독 아래’라는 뜻이다. 물질적 자연은 지고의 신이 뒤에 계시지 않으면 그렇게 경이롭게 움직일 수 없다. 물질적인 것이 저절로 움직이는 예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물질은 자력으로 행동할 수 없으며, 영적 접촉 없이 움직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물질은 독립적으로 혹은 저절로 행동할 수 없다. 기계가 아무리 훌륭하게 제조되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기계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끄리쉬나의 비인성적 에너지(impersonal energy) 안에 놓여있다. 끄리쉬나의 에너지는 비인성적이지만, 그는 사람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들의 훌륭한 행위에 대해 듣곤 하는데 그들이 왕성한 업적을 이룬 후에도 여전히 사람으로 남는다. 만일 그런 것이 사람에게 가능하다면 지고의 신께는 왜 가능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 사람이지만, 지고의 신 끄리쉬나께 의존하고 있다.
아틀라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신)의 사진을 보면, 건장한 남자가 큰 행성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것을 떠받치기 위해 몹시 버둥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끄리쉬나께서 우주를 유지하므로 아틀라스처럼 힘겨워하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끄리쉬나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창조된 모든 것이 내 안에 쉬지는 않는다. 신비한 나의 풍요로움을 보아라! 나는 모든 생명체의 유지자이며 모든 곳에 있지만 나는 이 우주적 발현의 일부가 아니니라. 그 까닭은 내가 바로 그 창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따 9.5》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끄리쉬나의 에너지 안에 놓여있지만, 그들이 끄리쉬나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끄리쉬나께서 모든 생명체를 유지하시고 당신의 에너지는 모든 곳에 편재(偏在)하지만, 당신은 다른 곳에 계신다. 이것이 이해 불가한 끄리쉬나의 신비로운 힘이다. 그는 모든 곳에 있지만 모든 곳에서 초연하다. 우리가 그의 에너지를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물질적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그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 자질을 발전시키면 우리 감각이 정화되므로 이 물질적 에너지 속에서도 그를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전기는 모든 곳에 있지만 전기 기술자만이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고신의 에너지는 모든 곳에 있고, 우리가 더 높은 영성으로 이 물질계를 초월하게 되면 물질적 눈을 가지고도 어디에서든 절대신을 보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 감각의 영성화는 절대신을 향한 봉헌과 사랑을 통해 이룰 수 있다. 끄리쉬나는 전 우주에 편재하시고 영혼 안에 존재하시며 심장, 물, 공기 등 모든 곳에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토, 돌, 나무든 어떤 것을 이용해서도 절대신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이를 단순히 인형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 또한 절대신이다. 우리의 헌애심이 깊으면 이미지 또한 우리에게 말을 걸 것이다. 절대신은 모든 곳에 비인성적으로 존재하지만(마야 따땀 이담 사르밤, 바가바드 기따 9.4) 무엇으로든 그의 인성적 형상을 만든다면, 혹은 우리 마음속에서 절대신의 상(이미지)을 떠올린다면, 당신이 몸소 우리를 위해 나타나실 것이다. 샤스뜨라(śāstra: 경전)는 여덟 가지의 이미지를 권장하고, 절대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므로 이 중 어떤 종류로라도 숭배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누군가는 항의하며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왜 절대신을 이미지로 숭배하고 그의 본래 영적 형상으로 숭배하지 않는 겁니까?”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절대신을 그의 영적 형상 있는 그대로 당장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적 눈으로는 오직 돌, 흙, 나무 등 만져서 알 수 있는 것들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 아르짜-비그라하(arcā-vigraha), 즉 지고한 주께서 스스로 우리를 위해 당신을 볼 수 있기에 편리한 형상으로 오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미지에 집중하고 사랑과 헌애를 바치면 끄리쉬나께서도 이미지를 통해 결국 반응하신다.
따라서 절대신은 모든 곳에 계시므로 신상 안에도 계실 수 있고 그를 위해 만든 이미지 안에도 계실 수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비인성주의자들도 인정하듯이 만일 끄리쉬나께서 모든 곳에 계신다면, 당신을 위해 만든 이미지 안에는 왜 계시지 않겠는가? 이미지이든 동상이든 우리에게 말을 걸고 안 걸고는 우리의 봉헌 정도에 달려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상을 단지 나무나 돌 조각으로 본다면 끄리쉬나께서는 우리를 위해 나무나 돌로 남아계실 것이다. 끄리쉬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고, 우리가 영적 의식을 발전시킬수록 그를 본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우편함에 편지를 넣으면 우편함은 권한이 부여된 곳이므로 편지를 수신지로 전달해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허가된 절대신의 이미지를 숭배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가 여러 규칙과 규정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다면, 즉 우리가 자격을 갖추면 절대신을 어디에서도, 모든 곳에서도 볼 수 있게 된다. 헌애자가 있을 때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의 편재하는 에너지로 당신을 어디에도, 모든 곳에도 나타내실 것이지만 헌애자가 없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 예는 많다. 쁘라흘라다 마하라자(Prahlāda Mahārāja)는 기둥 안에서 끄리쉬나를 봤다. 이런 예는 더 있다. 끄리쉬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를 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끄리쉬나께서 친히 당신의 편재함에 관한 예를 이렇게 보여주셨다.
“모든 곳에 부는 강한 바람이 하늘에 항상 있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내 안에 쉬고 있음을 알거라.” 《바가바드 기따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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