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은 한반도 강화도에 오지않았다 대륙고려 고려영토 원나라 대도 금나라 중도 고려개경 강화부위치
Автор: han korea
Загружено: 10 окт. 2024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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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께서 홍건적의 고려 개경 침입도 제대로 깊게 다뤄주세요, 요청이 만들어 보았습니다, 원나라 대도 북경이 개경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대도위치
홍건적 관련 역사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홍건적은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 입니다, 그 증거로 알려드리 겠습니다,
고려사 강화도 비장 왕동철이 적을 몰살시키다
1361년 12월 30일
강화부(江華府)가 거짓 투항하여 홍건적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비장(裨將) 왕동첨(王同僉)이 매복시켜 두었던 군사로 이들을 몰살시키니 홍건적이 감히 그 땅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1367년 03월 13일
기축 왜구(倭寇)가 강화부(江華府)를 노략질하였다.
최영이 공신에 책봉되고 철권을 하사받다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사이에서 혈전을 벌여 이름을 중국에 떨치고 나라의 위상을 드높였다. 홍건적(紅巾賊)이 서쪽 변방으로 난입하자 경이 선봉이 되어 승리를 거두고에서
강화부의 위치입니다. 강화부는 중국 양자강 아래 난징에 있습니다, 구 강화부 b좌 瓯江华府B座
로 네이버 한자사전에서 검색하면 땅의이름 강화부 자리입니다 구글지도에서 위치입니다
고려의 위치가 중국 동부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할 지역을 이탈한 관리들을 하옥시키다
공민왕(恭愍王) 1358년 서쪽으로는 홍건적, 동쪽으로는 왜구의 우환으로 에서 연해와 변경의 민(民)이 편히 살지 못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제멋대로 관할 지역을 이탈하였는가?”라고 하며, 즉시 하옥시켰다. 고려가 중국 동쪽에 있다는 기록입니다,
한반도는 서쪽과 동쪽이 바다로 홍건적은 배를 타고 와야 하는 말을 타고 다니다, 한반도 라면 서쪽-왜구, 북쪽-홍건적 됩니다
고려가 중국 동쪽 해안 방어
고려사에서 고려는 일찍이 출병하여 전투를 지원하지 않음이 없었고,
요수(遼水)의 동쪽 해안 1만 리가 그 덕분에 평온했습니다. 고려는 동쪽 번병이 되어 대대로 현저한 공을 세웠으며-
정몽주를 일본에 보내 해적 단속을 요구하다
고려사 1377년 09월 미상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원[大元]과 잇닿아 있고, 서쪽으로 명[大明]과 접해 있으므로 항상 군관(軍官)을 훈련시켜 방어하는 데 충당하고 있습니다. 중국대륙에서 고려는 동쪽 명은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명사 홍건적 일부가 요양을 거쳐 고려에 들어가다
〈지정(至正) 18년(1358)에〉 관선생(關先生)·파두반(破頭潘) 등이 다시 그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강주(絳州)를 나가고 하나는 심주(沁州)를 나갔다. 태행(太行)을 넘어 요(遼)·노(潞)를 격파하고 드디어 기녕(冀寧)을 함락하고 보정(保定)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서 완주(完州)를 함락하고 대동(大同)·흥화(興和) 등 새외(塞外)의 여러 군(郡)을 약탈하였으며, 상도(上都)를 함락하고서는 여러 궁전을 파괴하고 요양(遼陽)으로 옮겨 약탈하였으며 고려(高麗)에 이르렀다. 에서 홍건적은 고려의 개경 북경은 건드리지 않고 상도를 함락한 후 원나라 대도 고려 서경 거쳐 고려 천리장성인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침입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홍건적 이 원나라 대도를 공격한 기록을 한국데이터베이스에서 홍건적과 대도 를 검색하면 검색이 안됩니다, 원나라 대도의 위치는 금나라 중도에 원나라대도를 만든 것입니다, 그 위치는 구글지도에서 원중도로 중국이 원나라 중도 로 발굴한 지역입니다, 고려서경은 쉬안화 현 장자커우 시 허베이 성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나라 중도 모형과 위치입니다
이를 증명하는 고려사 기록입니다
고려사 고려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입조를 보고하고, 조서를 내려 고려 서경을 동녕부로 삼다
1270년 01월 14일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식(王禃, 원종)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신이 조서를 받들어 이미 복위하였으니, 이제 700인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가 뵙고자[入覲]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400인만 데리고 오고, 나머지는 서경(西京)에
머무르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고려 서경이 내속(內屬)하였으니 동녕부(東寧府)로 고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로 삼게 하였다.에서 원나라 대도와 서경이 지도와 같이 가깝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고려사 금 사신을 춘주를 경유하여 귀국하게 하다1177년 금(金)의 사신이 돌아갔다. 그때 서경(西京) 반군이 길을 막았으므로 동쪽으로 임진강(臨津江)을 건너서 춘주(春州) 경계를 거쳐 정주(定州)에 이르러서야 국경 관문을 나갔다. 에서 고려의 서북면 서경이 막히자 금나라 사신이 동북면으로 돌아 갔다는 기록으로 서경의 위치를 알수 있습니다,
동계는 만주쌍성 고려국경 서북계 자동적으로 대륙고려
쌍성총관부를 옮겨으면 동녕부 서경도 방향에 맞게 같이 이동해야 정상
군역과 요역 및 국방의 지역별 분담체계를 규정한 공민왕 5년의 개혁교서
고려사 원문이미지
일자
1356년 06월 미상 (음)
공민왕(恭愍王) 5년(1356) 6월 교(敎)하기를,
“각지에서 별초(別抄)를 추가로 정하면서 노약자나 단정(單丁)을 막론하고 강제로 멀리 가서 수자리 서게 하니, 오가는 데 지쳐서 잇달아 도망을 간다. 〈그래서〉 연해의 군민(軍民)은 모두 방수(防戍)에 충당하여 요역을 면제해주고, 먼 지역의 민(民)은 그 역(役)을 대신 부담하여 수자리하러 가지 않게 하면 양쪽이 모두 편안해질 것이다. 또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습속이 그러한 것이니 마땅히 동계(東界)와 교주도(交州道)의 군사는 쌍성(雙城)을 지키게 하고, 북계(北界)와 서해도(西海道)는 압록강을 지키게 하며, 양광도(楊廣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는 왜(倭)를 방어하는 것을 맡기되 재주와 용맹함이 있는 자는 어느 곳에서나 선발하여 쓰게 하라.”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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