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송하고 행복해지기 (Chant and Be happy) 제5장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일생
Автор: 하레 끄리쉬나 Hare Krishna
Загружено: 11 июн. 2020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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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상세한 일대기는 여기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 (Sri Caitanya Mahaprabh...
15세기 후반 인도 역사상 가장 비범한 정치·문화·종교 개혁가가 서벵골의 작은 마을에 태어났다.
이 뛰어난 인물은 간디보다 500년 앞서 거대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세습 카스트 제도의 답답한 제한을 타파해나갔고,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가 다 영적 깨달음의 가장 높은 단계를 달성하도록 했다. 그와 같은 행동을 통해 그 인물은 오만한 엘리트 지식인들의 인도 종교생활에 대한 지배를 무너뜨렸다. 모든 구시대적 제식과 신앙을 무시하면서 그는 인도 전역에서 급속도로 받아들여진 혁명적인 영적 운동을 도입했다. 광범위한 매력 때문에 그 운동은 지금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 강력한 혁신가의 이름은 스리 끄리쉬나 짜이따냐 마하쁘라부(Sri Krsna Caitanya Mahaprabhu), 현재의 하레 끄리쉬나 운동의 창립자였다.
인도의 베다 문헌은 그의 탄생을 오랫동안 예측했었다. 그는 1486년 나바드빕(Navadvipa)시의 마야뿌르(Mayapur)에서 태어났다. 곧 여러 성자와 학자들이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끄리쉬나의 위대한 헌애자 모습으로 나타난 절대 인격신 끄리쉬나 본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는 의례적인 종교 기능을 잘 참지 못했다. 또 성년으로 자라면서 그는 신성한 임무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에서든 모든 사람이 절대신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기를 바랐다. 그 절대신의 사랑에 따라 최고의 영적 황홀경을 느낄 수 있다. 스리 짜이따냐가 가르친 이 영적 깨달음은 산끼르딴, 즉 신의 신성한 이름, 하레 끄리쉬나 만뜨라를 구송하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는 순식간에 많은 신봉자들을 얻었다. 신봉자들은 즉시 하레 끄리쉬나 구송을 받아들였고 때때로 그들의 집이나 나바드빕 거리에서 구송을 했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산끼르딴 운동은 벵골지역을 지배하던 무슬림 통치자들과 인위적으로 종교의 대표직을 독점하려 했던 힌두 성직자 계급 같은 사회적 계층이 확립된 집단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래서 두 집단 사람들은 무슬림이자 현지 수석 치안 판사였던 찬드 카지(Chand Kazi)에게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를 고소했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와 그의 신봉자들이 기존 체제를 위협한다는 데 동의한 카지는 산끼르딴 운동의 성장을 진압하려고 했다. 카지의 명령으로 경찰관들이 짜이따냐 신봉자 한 사람의 집을 급습해 구송할 때 사용했던 남인도 북 므리당가를 박살냈다. 카지는 끄리쉬나의 성스러운 이름을 구송하는 것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또 만약 나바드빕에서 구송을 다시 시작하면 관련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급습소식이 전해지자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는 당시까지의 인도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시민불복종 운동을 조직했다. 예정일 저녁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와 1만 명의 신봉자들은 나바드빕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 여러 구송 그룹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거리에 나와 춤을 추자 하레 끄리쉬나 만뜨라 소리는 굉음처럼 울려퍼졌다. 마침내 구송자들은 카지의 거주지를 에워쌌고 카지는 안으로 숨었다.
하지만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제안에 따라 카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두 사람은 협상을 시작했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는 훌륭한 논리와 이유, 공손한 말씨를 통해 산끼르딴에 대한 고소가 근거 없다고 카지를 설득했다. 극적인 대화가 오고간 끝에 카지는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신봉자가 되어 산끼르딴 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보호했다. 힌두교인들은 그 뒤로 오늘날까지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무슬림 치안 판사의 무덤을 방문한다. 나바드빕의 무슬림 주민들은 카지의 시대 이후, 심지어 힌두-무슬림 간 충돌이 일어났을 때도 하레 끄리쉬나 만뜨라 길거리 구송을 방해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이 중요한 승리를 거둔 지 얼마 뒤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는 산끼르딴 운동을 인도 전역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6년 동안 그는 하레 끄리쉬나 만뜨라를 구송하고 신의 사랑을 확산시키며 나라 곳곳을 다녔다. 여러 장소에서 수십만 군중이 거대한 구송 그룹에 합류해 짜이따냐와 행동을 같이 했다. 그러나 반대파와도 맞닥뜨렸다. 그 반대파는 바로 인도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던 최강의 엘리트 철학자 집단인 마야바디(Mayavadis)였다. 자만심에 가득 찼던 그들은 신은 인격이나 형태가 없다고 주장하며 베다 문헌의 의미를 마음대로 왜곡했다. 이 비인성주의자들은 또한 영적 깨달음이 산스끄리뜨어를 알고 어렵게 베단따-수뜨라를 공부하는 선택된 소수만이 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스리 짜이따냐는 여행 내내 그 마야바디들과 맞서 싸웠고 설법의 설득력으로 그들 중 많은 사람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마야바디 학파의 대단한 철학자 사르바바우마 밧따짜리아(Sarvabhauma Bhattacarya)는 철학적 토론에서 스리 짜이따냐를 이겨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스리 짜이따냐는 신의 비인성을 설교한 밧따짜리아에 이렇게 반박했다. “생명체는 모두 개별적인 개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절대자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 중요한 부분이 개별적 개인들이라면 그들 유출의 원천이 비인성이어서는 안 된다. 절대자는 관련된 개인 가운데 최고의 개인이다.” 그 다음 주 짜이따냐는 원인 없는 자비를 베풀어 사르바바우마 밧따짜리아 앞에서 끄리쉬나로서 자신의 아름답고 원형 그대로이며 영적인 형태를 나타내 보이는 경이로운 기적을 행했다. 주 짜이따냐의 발아래 엎드린 그 옛 비인성주의 철학자는 짜이따냐에게 은신해 주님의 위대한 헌애자가 되었다.
그러나 마야바디와의 가장 큰 대결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대결은 수세기 동안 마야바디 학파의 본부 도시였던 바라나시(Varanasi)에서 일어났다. 그곳에서 주 짜이따냐는 친구, 신봉자와 함께 지냈고 어디에 가든 수천 관중을 끌어모으며 자신의 산끼르딴 운동을 계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마야바디 학파의 수장 쁘라까샤난다 사라스바띠(Prakasananda Sarasvati)는 주 짜이따냐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쁘라까샤난다 사라스바띠는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려면 모름지기 계속해서 추상적인 철학을 공부해야하며 절대 진리에 대해 장시간에 걸친 토론에 임해야한다고 믿었다.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종교 운동과 종파 분립과 분리주의자라는 억압적인 철학 간의 대충돌이 막 일어날 찰나였다.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는 곧 인도의 영적 사유와 실행을 지배하려는 비인성주의자들의 시도를 영원히 무효로 만들었다.
짜이따냐의 신봉자들은 마야바디들의 계속된 짜이따냐 비판에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짜이따냐는 그 신봉자들을 달래려고 마야바디 주역들의 모임 초대에 응했다. 모임에서 자리에 앉은 뒤 짜이따냐는 신령하고 지고한 힘을 공개하는 동시에 태양보다 더 눈부신 영적 광휘를 자신의 몸에서 드러내 보였다. 마야바디들은 대단히 놀랐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을 표했다. 그런 다음 쁘라까샤난다 사라스바띠는 왜 베단타 철학을 연구하는 대신에 구송을 하고 춤을 추는지에 짜이따냐에게 물었다. 주 짜이따냐는 대답했다. “나는 엄청난 바보라서 베단따 연구 대신 산끼르딴 운동에 빠져들었다.” 주 짜이따냐는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지적이고 건조한 베다 연구에 지나치게 우쭐해하는 마야바디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 연구는 결국 그들을 틀린 판단에 이르게 했다. 짜이따냐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엄청난 바보라서 내 영적 스승께서 내게 베단타 철학을 갖고 장난치는 것을 금하셨다. 그 분께서는 주님의 신성한 이름을 구송하는 것이 속박에서 나를 구제하기 때문에 더 낫다고 말씀하셨다.” 스리 짜이따냐는 그런 다음 그의 영적 스승이 항상 기억하라고 말했던 산스끄리뜨어 구절을 암송했다.
하레 나마 하레 나마
하레 나마이바 께발람
깔라우 나스띠 에바 나스띠 에바
나스띠 에바 가띠르 안야타
"싸움과 위선의 이 시대에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주님의 신성한 이름을 구송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브리한-나라디야 뿌라나(Brhan-naradiya Purana)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Brahman, 婆羅門)의 일원으로 태어난 주 짜이따냐는 그러한 명칭은 그저 외면적인 것이라고 항상 말했고 그에 따라서 행동했다. 주 짜이따냐는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고 가장 낮은 계급 출신 헌애자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곤 했다. 그런데다가 그는 비천한 계급의 일원인 라마난다 라야(Ramananda Raya)에게 신의 사랑이라는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전했다. 주님의 다른 제자인 하리다사 타꾸라(Haridasa Thakura)는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힌두 사회에서는 따돌림을 받았다. 하지만 스리 짜이따냐는 그를 나마짜리아(namacarya), 즉 신성한 끄리쉬나 이름의 영적 스승이라는 높은 위치로 격상시켰다. 스리 짜이따냐는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영적 향상으로 사람들을 판단했다.
이런 식으로 주 짜이따냐는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한 영적 자각의 과학적 과정은 현재 급속도로 지구촌에 확산되고 있다. 교회나 사원, 모스크 등에 참석하는 것이 날마다 줄어들고 세상이 여러 종교·정치 세력들 간의 폭력으로 분열되고 있는 요즘 이 시대, 외부의 분열을 초래하는 종교의 방식에 사람들이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져가는 것이 빤히 내다보인다.
사람들은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영성의 경험에 굶주려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적인 주 짜이따냐의 산끼르딴 운동에서 그 경험을 찾는다. 주 짜이따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산끼르딴 운동은 인류를 위한 가장 크고 주된 축복이다. 그 운동은 축복의 달빛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초월적 지식으로 가득한 삶이다. 초월적 더 없는 기쁨의 대양을 늘려주며 우리가 늘 열망하는 감로수를 충분히 맛보게 한다.”
(위 내용은 이 책 제 5장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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