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과 함께 세계 4대해전의 하나인 살라미스해전, 1,000배 크기의 거대제국 페르시아를 박살낸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은 무었이었을까?
Автор: 아테네공부방-Study Group on Athenian History
Загружено: Дата премьеры: 17 апр. 2025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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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은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과 함께 세계역사를 바꾼 4대해전의 하나로,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세계4대해전은 학자마다 다 다르게 꼽지만 살라미스 해전을 빼놓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가 왜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그리고 1,000배 크기의 거대한 제국이 온 국력을 동원해서 침공했다는데 그것을 조그마한 도시국가인 아테네가 어떻게 물리쳤을까?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한 것일까? 단지 그것 만으로 살라미스 해전이 유명한 것일까? 그리고 이 한번의 전투가 어떻게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말인가? 궁금하신 분은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 주시기 바란다.
살라미스 해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페르시아가 어떤 나라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인류최초의 최대 제국이었다.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서부터 지금의 터키와 중동지방은 물론 흑해연안을 아우르고 이집트까지 차지한 거대한 공룡 제국이었다. 중동지방의 맹주였던 바빌론을 무릎 꿀리고 유대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까지 굴복시킨 정복 국가였다. 땅덩어리로 치면 1,000배였다. 이것 만이 아니다. 땅덩어리의 크기도 크기이지만 페르시아는 불과 50여 년 만에 그 당시 지구문명권의 1/3을 집어삼켰을 만큼 전쟁에 이골이 난 나라였다. 그만큼 뛰어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들의 핵심 전력은 세 가지였다. 첫째, 기병이다. 유목 민족의 후예였던 그들은 말을 달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도 탐을 냈다는 전투마 니사이아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흑갈색의 깃털에다가 생긴 것도 용맹스러워 보이지만 싸움터에서도 절대로 겁을 먹는 일이 없었다. 이 말들이 끄는 전차를 앞세우고 기병부대가 돌격하면 상대는 추풍낙엽이었다. 둘째, 궁병이다. 이들은 합성활이라고 불리는 활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질긴 나무와 동물의 뿔을 깎아 강력한 접착제로 부착하여 만든 이 활은 작고 가볍지만 멀리 날아가는 특징이 있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신형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셋째, 불사대이다. 죽지 않는 부대라는 뜻을 가진 이 부대는 Immortals라고 하면 적군이 오줌을 지릴 정도로 가공할 전투력을 자랑하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가공할 적을 어떻게 무찔렀을까? 이 불가능할 섯 같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그 중심에 선견지명의 지도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고 그리스 사람들의 위대한 정신,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싸우다 죽겠다”는 강인한 정신이 있었다.
또하나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보여준 심리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오늘날까지 전세계의 사관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겠는가? 특히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때 보여준 심리전은 1석2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적군을 속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코린트 해변으로 돌아가자는 그리스 연합군의 주장을 잠재워야만 했다. 속된말로 일타쌍피를 노린 계략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의 방향과 물살의 변화까지 고려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적벽대전에서 보여준 제갈공명의 동남풍에 비견될 만큼 신출귀몰한 전략이었다. 이것은 최근의 한 과학적 기상 연구 결과에 의하여 뒷받침되기도 하였다. 지난 2020년 아테네 대학의 제로포스 교수와 그 일행들이 최근 수십년간 살라미스 인근의 기상자료를 분석한 결과 가을철 살라미스 해협에는 자정쯤 부터 북동풍이 불기 시작하여 8시경 바람이 더욱 강해졌다가 오전 10시경부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남서풍이 강하게 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전투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심리전의 달인으로서 그의 능력을 보여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 첫번째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인의 용사들이 장렬한 최후를 맞으며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에게 패배했을 때의 일이다. 이제 그리스 해군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 앞바다로 내려오기 전에 그리스 해군이 먼저 그곳에 도착해야만 했다. 이렇게 다급한 상황인 데도 테미스토클레스는 부하들에게 페르시아군이 중간에 식수를 채우기 위해 정박할 만한 곳은 모두 들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페르시아 병사들이 물을 길러 옴 직한 곳마다 격문을 붙이게 했다. 내용은 페르시아에 동원되어 참전하고 있는 같은 그리스 사람들인 이오니아 병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요약하면 그 골자는 이러했다. “이오니아의 병사들이여! 우리는 모두 같은 그리스 민족이 아니던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페르시아 진영을 이탈하여 그리스 진영으로 오라. 우리는 두 팔 벌려 당신들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굳이 열심히 싸우지는 말아라. 우리는 당신들의 공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보고 귀순해 오는 이오니아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테미스토클레스의 심리전은 실패한 것이 아닐까? 아니다. 이 심리전도 큰 효과를 보았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의도는 다른데 숨겨져 있었다. 이를 두고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해석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 격문을 붙인 것은 이오니아 병사들의 귀순을 노리고 한 것이 아니라 이오니아 병사들에 대한 크세르크세스의 의심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 심리전의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크세르크세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크세르크세스는 그 이후 바다에서 이건 육지에서 이건 이오니아 병사들에게 절대로 선봉을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이오니아 해군의 배가 가장 적게 파괴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흔히 의심은 또다른 의심을 낮는다고 한다. 그리고 귀국길에 오를 때에도 그때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이오니아 해군의 배에는 짐만 실려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택했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그가 뱃길이 무서웠을 수도 있지만 이오니아 해군을 믿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펼친 심리전의 압권은 살라미스 해전이 끝난 후에 있었던 역(逆) 공작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노예인 시키노스를 다시 한번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보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번 일은 미안하게 되었다. 내 반란의 의도를 그리스 사람들이 눈치채는 바람에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신세도 갚을 겸 내가 이곳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페르시아가 헬레폰토스 해협에 설치해 둔 부교를 빨리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의견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퇴로가 막힌 페르시아군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려 들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리스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일단은 잠재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무운을 빈다.” 당시 그리스 진영에서 이런 논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가 헬레폰토스 해협의 부교를 파괴하는 것을 적극 반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런 말을 전해들은 크세르크세스는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자신을 걱정해주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이 진심이라고 받아드렸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을 믿기는 커녕 일언반구도 신뢰하지 않았다. 아마도 ‘놀고 있네. 내가 한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아나 본데 이제는 네가 어떤 놈인지 나도 잘 안다.’ 이렇게 콧방귀를 끼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안심시켜 놓고 부교를 끊으려고 그러는 것일 지도 몰라’ 라고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테미스토클레스의 이 심리전은 실패한 것일까?
아니다. 이 심리전 또한 결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이 전한 말을 크세르크세스가 그대로 믿어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기대를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숨겨진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가 헬레폰토스 해협의 부교를 파괴할 수도 있음을 짐짓,
그리고 넌지시 크세르크세스에게 내비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귀향길이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해군이 크게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인 페니키아 해군마저 야반도주한 뒤였다. 이제 페르시아의 해군은 100여 척의 배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 그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이오니아 해군의 배였다. 페르시아의 해군력은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처참한 상황이었다. 바다길을 이용하여 퇴각하려던 당초 계획은 이제 포기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육로마저 퇴로가 끊기면 큰일이었다. 그의 막연한 걱정은 이제 떨칠 수 없는 불안감으로 발전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절묘한 심리전이 그 효과를 십분 발휘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우선 얼마 남아있지 않은 해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헬레폰토스 해협으로 가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 해군이 부교를 끊도록 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전해라.” 그리고 자신도 서둘러 아테네를 떠나 귀향길에 올랐다.함께 온 식솔들과 가지고 온 모든 짐은 배편으로 소아시아로 보내고 자신은 최대한 군장을 가볍게 하여 최소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래도 그 소수라는 인원이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팔레룸 항구에서 헬레폰토스 해협까지 1,500km를 단45일 만에 주파하였다. 험준한 산길을 하루 30여km씩 그야말로 꽁지가 쏙 빠지게 줄행랑을 친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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