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12월 23일, 전삼용 요셉 신부
Автор: 순전한 가톨릭(Mere Catholicism)
Загружено: 202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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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해 12월 23일 – 당신은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찬미 예수님.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뿌리'와 '본성'을 지키는 투쟁입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자 드라마인 『뿌리(Roots)』에 아주 처절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던 주인공 쿤타 킨테는 노예상인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옵니다. 백인 주인은 그에게 '토비'라는 노예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며 강요합니다. "네 이름은 뭐야?" "쿤타 킨테!" 채찍이 살점을 뜯어내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아프리카 이름을 외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단어 몇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름을 버리는 순간 자신의 뿌리(아프리카 전사)와 영혼을 잃고 백인의 소유물(노예 본성)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키는 것은 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한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습이자 혈통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서판에 단호하게 씁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즈카르야는 처음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들을 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이 아이는 내 핏줄을 이어받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어받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 '요한(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을 아들에게 부여하는 순간, 아기의 본성은 '인간 즈카르야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을 주는 대상이 자신의 '본성'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이 관계의 신비를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아",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의 본성을 담은 이름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분에게로 가서 '꽃',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책임지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 자신과 동등한 본성이 되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이름값을 하며 사느냐'입니다.
개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서 개가 사람이 됩니까? 우리는 개를 사람 대하듯 할 수 있지만, 개가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짖거나 문다면) 결국 개일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이름을 잊게 만들려고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셨습니까? 마녀 유바바는 온천장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아 버리고 '센'이라는 가명을 줍니다. 이름을 뺏긴다는 것은 곧 부모님과의 기억,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근원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주술이었습니다. 치히로는 자신의 본명을 잊어버릴 뻔하다가, 하쿠의 도움으로 진짜 이름을 기억해 냄으로써 마녀의 지배에서 벗어나 부모님을 구하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나의 근원인 부모님과 연결되는 생명줄임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 전해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전쟁터에서 겁에 질려 도망치다 잡혀 온 병사를 만났습니다. 대왕이 이름을 묻자 병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도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러자 대왕은 병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라!"
대왕은 자신의 이름이 용기와 정복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쓴다면 그 본성도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우리 본성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창세기 32장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즉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보크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한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뜻은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이 거창한 이름을 받고 나서 야곱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절뚝거리며 형 에사우에게 나아가 일곱 번 절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형을 두려워하여 뒤에 숨는 비겁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이긴 사람답게 당당하고 겸손하게 문제와 직면했습니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고 하느님을 이긴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형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겸손으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즈카르야는 아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줌으로써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게 해야 할 가장 큰 일도 이것입니다. 세례명을 주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만으로는 인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 세례명에 걸맞게 행동합시다. 프란치스코라면 가난을 사랑하고, 요셉이라면 의롭게 행동하며, 마리아라면 순종하십시오. 이름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십니다. 거룩한 이름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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