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성과 트라우마 스트레스
Автор: 김주환의 내면소통
Загружено: Прямой эфир состоялся 24 нояб. 2024 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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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고대 그리이스어로 트라우마는 원래 상처 혹은 외상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처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태를 넓은 의미에서 '트라우마 스트레스'라고 하며 그것이 만성적으로 심해지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게되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로 악화된 것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합니다.
일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충격이나 상처를 받은 경우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이겨내고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이러한 능력이 곧 회복탄력성입니다.
내 안에 있는 트라우마 스트레스와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크고 작은 힘든 일을 연속해서 겪거나 몸과 마음이 지쳐가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트라우마 스트레스로 인해 우리는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그마한 마이크로 트라우마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으며 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서는 트라우마 스트레스들과 함께 잘 살아가는 회복탄력성과 마음의 근력을 기르는 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특히 루퍼트 스파이라의 의식(consciousness)과 경험에 관한 통찰이 우리에게 유용한 자원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출처: 루퍼트 스파이라, "사물의 투명성", 근간)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열려 있고, 끝없으며, 자유로우며, 의식하며, 스스로 빛나며, 자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매 순간 겪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은 자신을 수축시킵니다. 의식은 자신을 움츠려 몸과 마음이라는 좁은 틀에 들어가고, 광활한 공간 속 아주 작은 위치와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 짧은 순간으로 자신을 한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이 매 순간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 근본적인 자기 수축입니다.
의식은 자신의 경험이라는 완벽한 총체 속에서 선을 그으며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것이고 저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있으며 저기에 있지 않다’, ‘나는 나이고 다른 이가 아니다’.
의식은 자신이 고립되어 있기에 연약하다고 느끼며 두려워합니다.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은 이제 자신이 자초한 파편이라는 정체성을 지지하고 지키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의식은 수축의 층을 겹겹이 쌓아 자신의 경계를 확고히 합니다. 마음 수준에서 이러한 수축은 한편으로는 욕망과 중독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 두려움, 거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나는 원한다’와 ‘나는 원하지 않는다’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들입니다.
몸 수준에서 이러한 수축은 의식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몸에서의 감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감각은 몸속에 있는 ‘나’의 외관적인 위치입니다.
수축의 새로운 층이 쌓일수록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은 자신의 끝없는 본성을 더 깊이 잊으며 그렇게 자신을 가립니다.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숨기는 것이지요.
수축의 새로운 층이 더해질 때마다 열려있고, 자유롭고, 무한한 의식은 자신의 무한한 본성을 점점 더 깊이 잊어가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베일을 씌웁니다. 의식은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숨깁니다.
그럼에도 의식 자신이 생성한 고립에는 의식의 진정한 본성을 떠올리게 하는 침투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낯선 이의 미소, 아기의 울음소리, 참을 수 없는 슬픔, 욕망을 충족해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 유머가 있는 순간, 깊은 잠이라는 평온, 생각하는 과정의 일시 중단, 어린 시절 기억, 꿈과 깨어남 사이의 전환, 아름다움을 인식할 때, 친구의 사랑, 힐끗 본 이해...
이제 가려진 의식의 현존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순간에 자신만의 자유와 행복을 무수히 음미합니다. 그렇게 의식은 외관상 자신을 가둔 요새의 유효로 다시 가려지기 전에 잠시나마 자신을 떠올립니다.
이렇게 자기 수축의 층이 겹겹이 쌓이면서, 의식은 잘 방비되어 있으며, 개별적이며, 연약한 개체로 자신을 격하합니다.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 일어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확정된 활동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활동입니다.
열려 있고,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바로 이 분리라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활동이 ‘사람’, 즉 ‘개별적인 개체’를 정의합니다.
개별적인 개체란 우리가 의식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의식이 자신을 수축시키고 이렇게 자신을 파편이라고 상상한 결과, 의식은 자신이 초래한 한정된 동일성이라는 경계 내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것을 자신 바깥으로 투사합니다. 이제 세상은 ‘바깥’과 ‘다른 이’로 나타납니다. 세상은 ‘파편으로서의 의식’이 아닌 모든 것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의식과 분리되어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세상은 의식이 자신을 한정적인 파편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완벽히 확증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파편으로서의 의식’을 담아내는 광활하며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그릇이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세상은 의식 속의 외관이자 의식의 표현이기에, 세상은 의식이 생각에 대해 품은 생각을 아주 정확하게 반영합니다
의식이 자신을 파편이라고, 한정적이라고, 얽매여 있다고, 시공간 속에 나타난다고 믿는다면, 세상은 그 파편에 대응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늘 우리는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이지만, 때로는 한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의식은 자신이 한 투사에 얽매인 것 같은 자신을 경험합니다.
의식은 자신의 끝없음 속에 경계를 투사한 후, 그 한계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잊습니다. 그것은 무지에 ‘빠집니다.’
그 결과 의식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이 왠지 이상하며,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며, 낯설다고 느낍니다. 의식은 그것을 잃어버렸기에 찾아야 한다고, 잊었기에 기억해야 한다고, 어딘가 다른 곳에 분리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의식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게 이미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자신이 이미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의식은 어느 순간에 알려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아는 알고 있음이 바로 자기 자신을 알기임을 명확히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식이 만든 파편과 의식 자신을 얼마나 깊이 동일시하든, 이러한 무지로 생성된 느낌과 활동이 얼마나 깊든, 의식이 자신의 본성을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성공적으로 숨기든 간에, 의식이 자신을 떠올리는 기억은 자신을 잊는 것보다 늘 더 깊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의식이 자신이 아닌 것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전에도 여전히 늘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로 말입니다.
의식은 경험의 특성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경험에서 가장 근본적인 경험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살피려는 찾기, 자신에게 돌아가려 하는 욕망, 자신 속에 머무르려 하는 욕망은 결코 사라질 수 없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이 찾기는 끊임없이 뒤흔들릴 것입니다. 의식이 늘 오로지 자신만을 경험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이와 동시에 의식이 갈 곳은 없으며 될 것은 없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현재 경험을 자기 자신 바깥에 투사합니다. 그러고 의식은 투사에서, 자신 속에서 투사한 마음/몸/세상에서 자신을 잃고, 그것의 일부를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마치 의식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 열려 있으며, 자유로우며, 끝없는 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 속에서 방금 창조한 이 한정적인 파편이다. 나는 몸이다.’
의식은 자신을 한정적인 개체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세상을 자신 바깥에 투사하는 것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래서 의식이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마치 대응하는 활동, 즉 의식이 자신을 찾으려면 해야 하는 무언가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 옵니다. 열려 있고 자유로우며 한계가 없는 의식은 곧 우리의 내밀한 자아입니다. 이는 언제나 오롯한 우리 자신이었고, 앞으로도 늘 오로지 자기 자신일 것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의식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떠난 적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의식은 자신에게 돌아가거나 자신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단지 자신의 인식, 즉 자신이 늘 오로지 자신 속에서 자신으로 머물러 왔다는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의식은 이전에 자신이라고 여겼던 개별적인 개체가 사실은 이따금 자신이 하는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은 이따금 자신이 하는 것처럼 보였던 활동, 즉 우리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그 활동이 사실은 늘 그대로인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의식은 명상이란 오고 가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상태가 오고 가는 곳임을 깨닫습니다.
명상은 단지 의식의 자연스러운 현존으로서, 항상 존재하며 모두를 포용합니다. 또한 변함이 없고 끊임이 없으며 무한하고 스스로 빛납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아는 것이며 자명합니다.
한정적이며 개별적인 개체의 관점에서 보면, 명상에 대한 모든 서술은 그 개별적인 개체가 해야 할 무언가로 나타납니다. 개별적인 개체가 의식이 자신에게 품는 신념과 느낌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확히 보이는 순간, ‘명상’으로 여겨졌던 과정이나 행동을 서술하는 것처럼 보였던 기존의 말들, 즉 무언가를 하라는 지시처럼 보였던 그 말들이 이제는 단지 사물의 모습에 대한 서술로 이해됩니다.
무지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우리의 모습이고 ‘명상’은 우리가 이따금 하는 것입니다.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명상’은 우리의 모습이고 ‘사람’은 우리가 이따금 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명상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수축을 이완하는 것이 손을 펴는 것처럼 하나의 활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마다, 개별적인 개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마다, 자신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경험의 완전한 영역에 선택이나 선호 없이 자신을 열 때마다, 의식은 자기 회피하는 습관, 즉 자신의 실재를 회피하는 습관을 자신도 모르게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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